“삼성, 현대, SK, LG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기업인들 자리에 계시면 잠시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1일(현지 시각) 한미 정상회담 직후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례적으로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한 한국 기업인들을 호명한 뒤 박수를 치며 “생큐, 생큐, 생큐”라고 감사를 표했다. 한국 기업들이 풀어놓은 대규모 투자 보따리에 만족감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미국 반도체 라인 증설과 SK·LG의 미국 배터리 공장 설립은 첨단 분야인 반도체·배터리를 앞세워 ‘한미 경제 동맹’을 더 공고히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44조원 선물 보따리
이번 정상회담 과정에서 발표된 한국 대기업들의 대미(對美) 투자액은 총 394억달러, 한화 44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170억달러를 들여 미국에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라인을 두 곳을 증설하기로 했다. 부지는 텍사스 오스틴이 유력하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500억달러를 지원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삼성전자도 상당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실리콘밸리에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신성장 분야를 위한 대규모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는 데 최소 10억달러 이상을 투자한다. 이미 지난 2019년 센터 부지를 확보해 놓은 상태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각각 GM, 포드와 손잡고 140억달러 규모 투자를 추진한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미국 전기차 공장에 74억달러를 투자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번에 발표된 투자안의 핵심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고, 미국이 전폭적인 인프라 지원과 세제 혜택으로 화답하는 ‘상호보완적 투자’이다. 핵심 고객사 확보와 시장 선점을 위해 미국 투자가 불가피한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첨단 분야 공급망 강화 정책에 올라타는 기회가 된 것이다. 지나 레이먼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인센티브와 용수, 원자재 등 기반 인프라에 대해 적극 지원하겠다”면서 “(한국 기업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반중 정책에 적극 협력
일각에서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반중 기술 연합’의 핵심 축을 맡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반도체·배터리를 비롯해 정상회담에서 기술 협력 대상으로 논의된 지식재산권, 희토류, AI, 5G(5세대 통신), 차세대 통신(6G), 오픈 랜(Open-RAN) 기술은 모두 미국과 중국간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은 이들 분야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기술·인력 탈취를 막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여기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특히 미국은 중국에 빼앗긴 5G 시장 주도권을 찾아오면서 미래 통신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냈다. 통신 장비에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탑재할 수 있는 오픈 랜 역시 장비·소프트웨어를 함께 공급하는 중국 화웨이를 겨냥한 기술이다.
다만 기업들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에 대한 고민이 복잡해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각각 중국 시안과 우시에 라인을 운영하고 있는 데다 최대 반도체 수출국도 중국이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양자택일을 요구받을 위협이 여전히 존재한다. 배터리 업체들과 현대차도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