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대전 유성구 장동에 있는 로봇 스타트업 트위니. 김태형(31) 개발본부장과 직원 5명이 이날 오후 대전 지하상가에서 실증실험에 나설 자율주행로봇 ‘나르고’를 점검하고 있었다. 카이스트(KAIST) 출신 천홍석(40) 대표와 쌍둥이 동생 천영석 대표가 2015년 창업한 트위니는 자율주행 로봇 나르고와 추적로봇 따르고를 상용화해 올해 매출 33억원을 올린 기업으로 키웠다. 직원수도 1년 새 50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 천영석 대표는 “새해에도 50명 이상을 새로 채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트위니 인근에 위치한 스타트업 10여 곳 중 하나인 비플렉스에서도 카이스트 출신 30대 창업자 3명이 국내 대형 가전매장에 납품할 보행분석 이어폰을 한창 포장하고 있었다. 이 회사의 이어폰 비플렉스 코치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사람의 걸음걸이와 자세를 분석해 바로잡아준다.
서울·판교에서 싹튼 한국의 스타트업 DNA가 전국으로 확산되며 곳곳에 스타트업 밸리가 들어서고 있다. 기술로 무장한 혁신 스타트업들은 대기업 공장이나 중소 산업단지가 유일한 일자리였던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비수도권 최대 스타트업 밸리인 대전을 비롯해 부산·강원·제주·대구 등에도 지역의 강점을 살린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의 머스크 몰려있는 대전 스타트업 밸리
대전은 비(非)수도권 최대 스타트업 밸리이다. 최근 5년간 대전에서 탄생한 기술 기반 스타트업만 600곳이 넘는다. 대전 스타트업들의 거점은 카이스트와 충남대 일대다. 벤처캐피털 TBT의 임정욱 대표는 “학교 실험실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이 성장한 뒤에도 학교 주변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곳에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기술과 아이템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려는 창업가들이 밤을 새우며 일에 몰두하고 있다.
카이스트 플라스마 물리학 연구실 출신인 엄세훈(47) 대표가 세운 인투코어는 플라스마로 이산화탄소를 분해해 수소와 메탄올을 생산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엄 대표의 전략은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와 비슷하다. 머스크가 우주 사업을 하기 위해 테슬라 자동차로 돈을 벌듯이, 인투코어는 반도체 식각(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냄)용 플라스마 장비로 매출을 올려 2024년 상장한 뒤 이산화탄소 분해 기술 개발에 뛰어들겠다는 것이다. 역시 카이스트 플라스마 실험실 출신인 플라즈맵의 임유봉(40) 대표는 석사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뛰쳐나와 2015년 창업했다. 임 대표는 실험실 선후배들과 함께 의료용 플라스마 멸균기를 개발해 올해 53국에 수출했다. 그는 “6년 전만 해도 창업이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취업이 최후의 보루로 여겨질 정도로 카이스트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했다.
이 밖에 식물의 생장 단계별로 빛의 파장을 달리해 특정 성분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인공광원을 개발한 쉘파스페이스, 3D 현미경을 미국·유럽에 수출하는 토모큐브, 전기자동차를 무선 충전하는 와이파워원 등 수많은 스타트업이 대전 스타트업밸리에서 성장하고 있다.
창업을 꿈꾸는 카이스트 학생들은 학교 쪽문 앞에 있는 창업 육성기업 블루포인트파트너스를 사랑방처럼 들락거린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는 카이스트 출신 창업가 이용관 대표가 2014년 세운 창업 육성 기업으로, 초기 기술기업에 투자하고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회사의 차병곤 본부장은 “본사를 대전 시내에서 카이스트 앞으로 옮긴 지 8개월 만에 1000여 명이 찾아와 창업 멘토링을 받고 갔다”고 했다.
◇활력 잃어가는 부산·대구, 스타트업으로 부활 꾀한다
일자리 부족과 수도권 집중으로 활력을 잃어가던 지역 대도시도 최근 의욕적으로 스타트업 거점 시설과 지역 밸리를 육성하고 있다. 부산에는 글로벌 기업들이 스타트업 발굴과 육성을 위해 진출하고 있다. 지난 11월 구글과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스파크랩은 부산역에 창업공간 ‘B 스타트업 스테이션’을 열었다. 스파크랩은 “블록체인·핀테크를 비롯한 첨단 기술기업과 환경에 주목한 그린테크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23일 이곳에서 만난 정택수 넷스파 대표는 “서울에서 기피하는 폐기물 재활용 산업이 이곳에선 집중 육성 산업”이라면서 “폐어망에서 나일론 원료를 추출하는 재생 공장 설립 허가를 받아 곧 대량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인공지능·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접목한 산업현장 안전 검사 설루션 스타트업인 무스마는 2017년 부산의 조선업체에서 성능을 인정받으며 급성장했다. 진준호 무스마 이사는 “현재 주요 건설·조선사 10여 곳과 일하고 있고, 인도네시아 등 해외 현장에도 제품을 공급한다”고 했다. 부산 부경대 근처 200여 개 기술 스타트업이 몰려있는 드래곤밸리도 지역 창업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구에도 지난 11월 대구 동대구역 옆에 연면적 1만3954㎡(지하 4층, 지상 11층)의 대규모 창업센터 ‘대쉬’가 들어섰다. 동대구 벤처밸리의 중심인 이곳에만 스타트업 40여사가 입주했다. 이 센터 관계자는 “대구는 삼성전자 사내벤처 프로그램인 C랩과 함께 성장 가능성이 큰 스타트업을 지역에 유치하는 전략으로,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을 길러낼 것”이라고 했다. 360도 가상현실 촬영 장비 스타트업 쓰리아이, 콜드체인 패키징 스타트업 에임트 등이 대표적인 대구 스타트업이다.
◇대학·KTX 가까워야 성공
광주광역시(로봇·AI), 강원(바이오·헬스케어)에서도 지역 중심지 주변으로 스타트업 밸리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특히 강원도는 이재웅 다음 창업자가 세운 벤처캐피털 소풍벤처스가 2020년 본사를 춘천으로 옮긴 뒤 지난해에만 지역 스타트업 11곳에 투자했다.
투자자들이 꼽는 지역 스타트업 밸리의 핵심 입지 조건은 대학과 교통이다. 부산·대구·광주·강원 모두 KTX역을 중심으로 스타트업들이 모이고 있다. 대전 카이스트~충남대 스타트업 밸리도 KTX역이 30분 내 위치할 뿐 아니라 바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는 “우리가 강원도를 주목한 요인 중 하나도 서울 접근성이 높다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지역에 있는 진주 같은 스타트업들을 발굴해 육성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