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고일권 웹툰작가의 작업실. 조선 시대 ‘이괄의 난’을 주제로 한 무협 웹툰 ‘칼부림’을 그리는 고 작가는 먼저 종이에 붓으로 습작 스케치를 그린 다음 이를 스캔해 컴퓨터로 전송했다. 다음부터는 AI(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다. 컴퓨터에서 ‘AI 페인터’ 프로그램을 실행한 뒤, 마우스를 한 번 클릭하자 1초도 안 돼 자동으로 스케치에 색이 칠해졌다. 작가가 원하는 색깔 톤만 지정해주면, AI가 배경과 사람, 사람의 피부와 옷을 구별해 알맞은 색을 골라서 칠해주는 방식이다. 고 작가는 “습작을 할 때 포토샵 프로그램과 태블릿용 터치펜으로 작업하면 한 컷당 족히 한 시간은 걸렸는데, AI 프로그램을 쓴 이후로는 5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문장만 치면 알아서 그림 그리는 AI
예술가의 영역을 넘보는 AI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스케치만 하면 알아서 칠해주고, 심지어 문장 하나만 입력해도 AI가 알아서 캐릭터를 만들고 웹툰까지 창작해주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간 일부 작가들은 어시스턴트 직원을 두고 이런 작업을 해왔다. 창작 관련 AI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도 점차 늘고 있다. IT 업계 관계자는 “이제 아이디어만 있으면 그림 실력이 없어도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다”고 했다.
국내 최대 웹툰 플랫폼을 보유한 네이버는 이미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네이버웹툰은 지난해 출시한 ‘AI 페인터’에 웹툰 1500여 작품, 30만장의 이미지를 학습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AI가 사람의 얼굴과 신체, 배경을 자동으로 구분해 채색을 한다. 시범 서비스 이후, AI가 그린 웹툰 이미지 데이터가 56만장 이상 축적됐다. 여기에 ‘스토리테크’란 이름도 붙였다. 네이버웹툰 관계자는 “계속 습작 데이터가 쌓이면서 프로그램이 점차 정교해지고 있다”며 “앞으로 실제 풍경 사진을 웹툰 배경으로 변환하고, 인물 사진을 웹툰 캐릭터로 바꿔주는 기술 등도 도입할 계획”이라고 했다.
AI 스타트업 툰스퀘어는 글로 쓴 문장을 만화로 바꿔주는 AI 웹툰 서비스 ‘투닝’을 운영 중이다. 아예 그림에 소질이 없는 초보들을 공략하고 나선 것이다. 예를 들어 ‘철수는 신이 났다’라고 입력하면 기뻐하는 모습의 사람 캐릭터가 ‘뚝딱’하고 나온다. 여기에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입력하면, 나를 닮은 캐릭터로 또 한 차례 진화한다. 문장을 길게 입력하면 할수록, 섬세한 연출이 가능해진다. AI가 학교·골목·사무실 등 스토리와 어울리는 세세한 배경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캐릭터와 대사까지 삽입하는 식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도 웹툰 자동 생성 기술인 ‘딥툰’을 개발 중이다. 작가가 시나리오를 짜고 작품 초고인 스케치만 입력하면 인공지능 딥러닝 시스템이 나머지 웹툰을 그리는 방식이다. ETRI는 “딥툰이 완성되면 웹툰 제작 과정에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소설·작곡 등 창작 영역 확대
AI는 웹툰뿐 아니라 소설, 음악 등 다양한 분야로 창작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카카오의 AI 계열사 카카오브레인은 지난달 이미지 생성 AI 모델 ‘RQ-트랜스포머’를 공개했다. 작년 말 공개한 AI 화가 ‘민달리’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예컨대 ‘사막에 있는 에펠탑’이라는 문장을 입력하면, 마치 화가가 그린 듯한 수십종의 각기 다른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카카오브레인은 “3000만쌍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학습한 국내 최대 이미지 생성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작년 8월엔 AI 소설가 ‘비람풍’이 560쪽 분량의 장편 소설을 내기도 했다. 소설가 김태연이 세운 AI 스타트업 ‘다품다’가 개발한 것으로 소설 1000권, 뉴스기사, 논문 등을 두루 학습했다. 사람이 주제와 소재, 배경, 캐릭터를 설정하면 AI가 주어진 조건에 따라 세부적인 이야기를 창작하는 ‘협업 소설’이다. KT 음원 자회사 지니뮤직은 지난 2020년 AI 스타트업 업보트엔터테인먼트와 함께 AI가 작곡한 동요와 자장가 앨범을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