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데이터가 부족해서 AI(인공지능) 기술 발전이 더딘 걸까요? 아닙니다. 결국 사용자들의 개인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기업들을 못 믿으니까 진척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개발한 동형암호 기술을 활용하면 더 이상 유출과 해킹 걱정 없이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천정희(53)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는 지난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 안에 있는 암호기술 스타트업 크립토랩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차세대 암호기술인 동형암호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천 교수가 2017년 세운 크립토랩은 ‘암호계의 난제’라 불리는 동형암호를 산업으로 끌고나온 기업이다. 천 교수는 동형암호에 대해 “암호화돼 있는 원천 데이터의 암호를 풀지 않고도 연산·분석을 할 수 있는 기술”이라며 “가공 과정에서 암호를 풀지 않으니, 유출돼도 해커가 들여다볼 수 없다”고 했다.

크립토랩은 이 같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벤처투자 빙하기’임에도, 지난 5일 스톤브릿지벤처스·알토스벤처스 등으로부터 210억원 투자를 유치했다. 스톤브릿지벤처스의 최동열 파트너는 “크립토랩의 동형암호 기술과 특허는 세계 표준을 주도하고 있어, 가까운 시일 내 큰 사업적인 성과가 기대된다”고 했다.

천정희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 겸 크립토랩 대표가 지난 13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자사의 동형암호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해외시장 진출을 본격 적으로 추진해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금융, 의료, 마케팅 분야 개인화 인공지능 시장을 선도하겠다"고 말했다. /크립토랩

◇서울대 수학 교수의 창업 도전

천정희 교수는 암호학의 대가로 전 세계 학계에 알려진 인물이다. KAIST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딴 뒤, 2003년부터 서울대학교 수리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2016년 그동안 동형암호 상용화의 걸림돌이었던 느린 계산 속도 문제를 해결해 특허를 받았고, 이듬해 크립토랩을 창업했다”고 말했다. 천 교수 연구팀은 2017년 국제 유전정보 분석 보안 대회(iDASH)에서 동형암호 계산 분야 1위를 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암호화된 암 환자 900여 명의 유전자 정보를 동형암호 기술로 분석해 암 종류를 알아맞히는 대회였다. 그는 “당시 2위를 기록한 마이크로소프트(MS) 리서치팀보다 30배 빨랐다”며 “현재 동형암호 산업화를 주도하는 IBM과 MS 모두 크립토랩의 원천기술 알고리즘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후 크립토랩은 2020년 국민연금공단, 개인신용평가 전문 업체 코리아크레딧뷰로와 함께 세계 최초의 동형암호 상용화에 성공했다. 천 교수는 “연금 데이터와 신용평가 데이터의 암호를 풀지 않고 분석해 국민연금을 성실하게 낸 사람의 신용을 높게 평가하는 데이터 통계 모델을 만들었다”고 했다. 또한 지난해에는 질병관리청과 함께 개인정보 노출 없이 코로나 확진자와 자신의 동선이 겹쳤는지 확인하는 앱을 개발하기도 했다. 천 교수는 “현재 IBM, 삼성전자, 네이버클라우드 등과 동형암호 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고 했다.

◇“수학자들 창업계로 나와야”

천 교수는 “이제 수학자들이 창업과 산업 분야로 적극 나와야 할 때”라고 했다. 그는 이를 ‘지식의 생산 라인’에 빗대어 설명했다. “수학 이론이 나오면, 이를 과학자가 발전시키고, 공학계에서 활용한 뒤, 기업이 제품으로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생산 라인 끝단에 있던 기업들의 원천기술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서, 우리 수학자들과 ‘직거래’를 시작한 거죠. 수학자도 연구실 밖으로 나와 산업계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실제로 천 교수도 2015년부터 권오현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과 만나 수학을 반도체 등 삼성전자 신사업에 활용할 방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천 교수는 “이때 인연으로 현재 동형암호 계산에 필요한 칩을 삼성전자에서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투자받은 210억원으로 인재 영입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이다. 천 교수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 하는 수학자들을 모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 시장에도 진출한다는 전략이다. 그는 “모든 데이터 분석에 우리 기술을 쓰도록 하는 게 목표”라며 “이 분야에서 경쟁자가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는 초격차를 만들겠다”고 했다.

☞동형암호

동형암호(同形暗號, Homomorphic Enc ryption)는 데이터를 암호화한 상태에서도 계산할 수 있는 암호 기술이다. 암호화된 채 계산한 값과 암호화하지 않고 계산한 값이 같다고 해서 ‘동형’이라 이름 붙었다. 의료나 AI 등 개인 정보 규제가 심한 분야에서 데이터 유출과 해킹을 막아줄 수 있는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