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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테크 분야에서 독자 여러분의 사랑을 받았던 디코드가 ‘홀리테크(Holy Tech)’로 새단장합니다. 디코드보다 영역을 넓혀 기초과학부터 과학, 바이오, 테크 등 이공계의 모든 영역을 독자 여러분의 눈높이에서 다루겠습니다. 최대한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외신과 논문을 참조하겠습니다. 많은 성원과 비판 부탁 드립니다.
지난달 17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 문을 연 실패 박물관(Museum of Failure)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여겨져 시장에 출시됐다가 실패한 제품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백투더퓨처의 자동차 드로리안, 열성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던 코라콜라Ⅱ, 휴대용 LP 플레이어, 전기 충격 피부 관리 마스크 등 다양한 제품 159개 제품들이 전시돼 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에 2013년 처음 출시됐던 구글 글라스도 있습니다.
구글 글라스는 등장 당시만 해도 ‘세상을 바꿀 기술’로 칭송 받았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모바일 시대’의 종말이 임박했다며 환호하는 전문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글 글라스는 사생활 침해 등 여러 사회적 논란을 빚으며 쓸쓸히 퇴장했습니다. 아직까지 구글 글라스의 신제품 소식을 들리지 않고 있죠.
머리에 쓰거나 안경처럼 착용하는 첨단 기기의 개념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미국 공상과학(SF) 작가 스탠리 G. 와인바움은 1935년 쓴 저술에서 ‘피그말리온 안경’이라는 제품을 등장시킵니다. 홀로그램 기술과 촉각, 후각을 가상현실화할 수 있는 안경으로 묘사됐습니다. 1968년에는 미국 유타대의 이반 서덜랜드가 현재 가상현실 기기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HMD)’를 개발합니다.
TV시리즈 스타트랙의 우주인들도 가상현실 안경을 착용했고, 만화 드래곤볼의 스카우터도 비슷한 개념이었습니다. 양손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각종 멀티미디어까지 즐길 수 있는 기기라니, 누구나 탐낼 만한 제품이지 않습니까. 특히 메타버스에 빅테크와 전세계 스타트업들이 앞다퉈 뛰어들면서 착용형 기기는 곧 전성기를 맞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구글 글라스를 비롯해 지금까지 등장한 착용형 기기들은 대부분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야심차게 내놓았던 혼합현실(VR+AR=MR) 기기 홀로렌즈는 산업 현장에서 한정적으로 쓰이는데 머물고 있고 HTC의 바이브(Vive)도 수년째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지만 좀처럼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이 사명까지 메타로 바꿔가며 올인해 온 오큘러스 시리즈, 삼성전자의 기어VR,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VR 역시 기대에 호응하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는 수준이죠. 그나마 메타는 2020년부터 400달러짜리 퀘스트2 2000만개를 판매했지만, 최근 프리미엄 모델인 퀘스트 프로의 가격을 1500달러에서 1000달러로 대폭 내릴 정도로 고전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애플이 온다
이 시장에 역대 최고의 대어(大魚)가 곧 등판합니다. 다른 업체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개척한 시장에 뒤늦게 완벽한 제품을 들고 나타나 홀랑 가로채는 것으로 유명한 기업, 바로 애플입니다. 외신과 업계 전문가들은 애플이 6월, 늦어도 연말에 혼합현실 헤드셋을 내놓는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블룸버그는 지난달 26일 최근 애플의 성지인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스티브 잡스 극장에서는 100명의 최고 경영진이 모여 새로운 혼합현실 기기 시연을 관람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공개는 오는 6월 5~6일 미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애플파크에서 열리는 연례 개발자 행사 ‘세계개발자대회(WWDC) 2023′ 무대가 유력합니다. 공개만 이때 하고 출시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도 있습니다. 가을 아이폰 신제품 발표장이 무대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비관적인 전망이 많긴 합니다. 애플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은 거죠. 하지만 애플은 ‘콩나물’이라는 조롱을 받았던 에어팟, ‘사각형 시계가 말이 되느냐’고 비판 받았던 애플워치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성공을 만들었습니다. 마치 애플이 하면 그게 진리가 된다는 식이죠. 식어버린 메타버스 열풍 속에서 애플이 내놓은 혼합현실 기기에 대한 전세계 외신과 테크 전문가들의 전망을 정리해 봤습니다.
◇팀 쿡 “증강현실 없는 세상 상상 못하는 시대 온다”
애플이 2015년부터 개발해온 증강·가상현실 기기를 공식화한 것은 5년 전입니다. 애플이 차기 주요 제품을 논의하는 워크숍을 캘리포니아 카멜밸리에서 열었을 때 애플의 디자인 총괄 조너선 아이브(네. 잡스 전기 영화에 등장했던, 아이맥을 만든 그 아이브입니다)가 100여명의 경영진 앞에서 컨셉 비디오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당시 관계자들은 ‘진짜 애플 광고만큼 세련됐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 동영상에는 런던 택시에서 혼합현실 기기를 착용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한 남성이 등장합니다. 남성은 “런던에 올래?”라고 아내에게 물어보고, 부부는 남편의 눈을 통해 본 런던을 풍경을 공유합니다. 뉴욕타임스는 “이 동영상은 디지털 세계와 실제 세계를 혼합하는 애플의 차세대 디바이스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경영진을 흥분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 후 애플은 지속적으로 혼합현실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지난해에는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대학생 대상 강연에서 “가까운 미래에 증강현실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하게 될 것”이라며 “오늘날의 사람들이 과거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VR, AR 자유롭게 오가는 헤드셋... “우리는 메타버스 아니다”
신제품의 사양과 성능은 모두 내부인들의 말을 종합한 외신과 전문가들의 추정입니다. 다만 과거에는 애플의 신비주의가 철저하게 지켜졌지만, 최근에는 미리 알려진 정보들이 꽤 정확한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소식에 따르면 애플의 혼합현실 헤드셋은 스키고글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가격은 3000달러가 유력합니다. 이전까지 나왔던 어떤 AR·VR기기보다 비싼 가격입니다. 애플이 남들보다 싼 제품을 내놓을 리 없죠. 블룸버그와 디 인포메이션 보도에 따르면 애플 혼합현실 기기의 이름은 리얼리티 프로(Reality Pro)가 유력합니다. 일각에서는 리얼리티 원(one)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리얼리티 프로는 탄소 섬유를 활용한 프레임, 허리에 차는 외부 배터리팩, 실제 외부 환경을 보여주는 카메라, 애플리케이션과 영화까지 모든 것을 재생하는 2개의 4K디스플레이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용자는 애플워치나 에어팟맥스에 있는 것 같은 디지털 크라운 형태의 ‘다이얼’을 돌려 헤드셋에서 외부 환경을 얼마나 보여줄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VR과 AR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VR 상태에서는 착용자가 완전히 영화관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AR이 활성화되면 콘텐츠의 강도로 옅어지면서 구글 글래스와 같은 환경이 되는 식입니다. 사용자의 눈동자를 트래킹하고, 손을 움직여 게임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사용하던 앱도 상당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애플은 내부적으로 리얼리티 프로의 기본 앱을 코프레즌스(공현존감·copresence)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크 저커버그가 메타버스의 비전을 제시한 것처럼 애플 역시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죠.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팀 쿡 CEO가 (혼합현실을 얘기하면서도) 메타버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용칩 ‘리얼리티 프로세서’ 탑재
운영체제는 xrOS라고 부릅니다. 아이폰의 iOS처럼 리얼리티 프로 역시 별도의 운영체제를 갖게 되는 겁니다. 엔가젯 등에 따르면 xrOS는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와 동일한 기능을 많이 갖고 있지만 환경이 3D(3차원)라는 점이 다릅니다. 애플 사용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애플은 자사 기기 사이의 생태계를 무엇보다 중시합니다. 맥북을 열어도, 아이폰을 열어도, 아이패드를 열어도 비슷하다는 느낌이죠. 리얼리티 프로 역시 비슷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리얼리티 프로에는 애플이 자체 개발해 맥과 맥북 프로, 아이패드 프로 등에 탑재하고 있는 M2칩을 변형한 전용칩 ‘리얼리티 프로세서’가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리얼리티 프로세서는 강력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배터리 발열입니다. 맥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머리에 착용하는 기기에서 발열은 심각한 걸림돌이 됩니다. 블룸버그는 “애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터리를 허리에 착용하게 하고 케이블로 기기와 연결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배터리팩 하나 당 리얼리티 프로 2시간을 사용할 수 있고, 크기는 아이폰14 프로맥스 두 개를 겹쳐놓은 정도입니다.
리얼리티 프로는 맥 컴퓨터와도 호환됩니다. 가상 현실에서 맥의 디스플레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식입니다. 다만 조작은 트랙패드나 마우스, 키보드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블룸버그는 이 헤드셋의 단점으로 공간 음향을 꼽았습니다. 비디오는 뛰어난 몰입감을 제공하지만 스피커는 다소 빈약하다는 내부 평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에어팟과 연동이 되기 때문에 애플 사용자에게 큰 문제는 되지 않을 전망입니다.
◇애플·소니·디즈니·돌비 뭉친 최강의 드림팀
애플은 콘텐츠의 최강자 월트디즈니, 영상음향의 최강 돌비 등 강력한 미디어 파트너들과 플랫폼용 VR 콘텐츠를 준비했습니다. 2020년에는 스트리밍 회사 넥스트VR을 인수해 스포츠 콘텐츠 전용팀도 꾸렸습니다. 4K디스플레이는 소니와 함께 개발했습니다. 최고의 하드웨어 회사와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 최고의 콘텐츠 회사가 힘을 합친 ‘드림팀’인 셈입니다.
애플은 영상통화 기능인 페이스타임도 리얼리티 프로에 도입합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리얼리티 프로는 가상현실에서 사용자의 얼굴과 전신을 랜더링해 아바타를 만들어냅니다. 이 아바타를 이용한 페이스타임은 마치 대화하는 사람이 같은 방에 있는 것처럼 통신하고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소프트웨어 처리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헤드셋의 화상 채팅과 아바타 지원은 1대1 기능만 지원한다고 합니다. 추가 사용자는 아이콘 또는 애플의 맞춤형 이모티콘으로만 표시됩니다. 다만 이전의 애플 신제품과 마찬가지로 애플은 우선 미국에서 먼저 리얼리티 프로를 출시한 뒤 전세계로 확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렴한 후속 모델도 개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2024년말 또는 2025년 초에는 1500달러 수준에 저가형 모델이 개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메타의 오큘러스 프로와 비슷한 수준의 가격입니다.
◇2016년 이후 첫 신제품 라인업
애플은 이 프로젝트에 7년간 1000명이 넘는 개발자들을 투입했습니다. 애플이 이만한 자원을 쏟아 부은 것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에어팟, 애플워치 등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가 정체될 때 리얼리티 프로가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리얼리티 프로는 2015년 애플워치, 2016년 에어팟이 출시된 이후 처음 등장하는 애플의 신제품 라인업이 될 전망입니다.
하지만 애플 입장에서도 혼합현실 기기는 거대한 도전입니다. 애플 전 현직 직원들 여럿이 뉴욕타임스에 “애플의 새로운 기기에 대한 열정은 회의론으로 바뀌었다”면서 “3000달러라는 가격에 대한 우려, 유용성에 대한 의구심, 입증되지 않은 시장 등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폰 개발 방식과 가상현실 기기 개발이 근본적으로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겁니다. 아이폰은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디스플레이, 터치스크린 등 기존에 이미 있던 기술을 최적화해 통합하는 방식으로 탄생했습니다. 반면 가상현실 기기는 핵심 구동칩부터 디스플레이까지 모두 새롭게 설계하고 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메타와 HTC, 마이크로소프트가 겪었던 문제를 애플이 단숨에 해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애플은 생태계를 구축해 전세계의 수많은 앱 개발사와 게임업체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하는데, 아직까지 가상·증강현실 시장에는 그런 업체가 많지 않습니다. 리얼리티 프로의 데뷔 초는 아주 제한적인 콘텐츠와 기능만 구현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천천히 시장 장악하는 애플워치 전략 따를 듯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애플은 리얼리티 프로를 출시 첫해에 100만대 정도 판매하는 목표를 잡았습니다. 개당 3000달러이니 30억달러의 매출을 기대한다는 겁니다. 애플의 연간 매출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는 수준이고, 초창기의 개발 비용과 부품 가격 등을 감안하면 수익도 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블룸버그는 “애플이 애플워치의 판매 전략을 리얼리티 프로에도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애플워치는 평범한 앱, 복잡한 인터페이스, 느린 구동속도, 뚜렷하지 않은 목적 등의 비판을 받았지만 점차 성능을 개선하고 건강 관리와 아이폰 알림이라는 정체성을 수립하면서 애플 전략의 핵심이 됐다”고 했습니다. 첫 제품은 아니겠지만, 애플이 일단 소비자들이 사용하게 하면서 고치고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개척하려 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이 과정을 거쳐 애플워치는 2021년 스위스 시계 산업 전체를 앞섰고 전세계에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시계가 됐습니다.
한 IT전문가는 애플의 전략을 테슬라에 비유합니다. 테슬라는 10만달러짜리 전기차 로드스터를 내놓고 관심을 모았지만, 결국 더 폭넓은 매력을 가진 전기차로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애플 역시 비싼 리얼리티 프로로 시장에서 압도적인 선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은 뒤 상대적으로 저렴한 후속 모델로 전세계 시장을 개척하려 한다는 겁니다. 물론 아직까지 모든 것은 전망에 불과합니다.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한 뒤에 대부분 비판 일색인 예상이 옳았는지, 아니면 결국 애플이 진리였는지 판단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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