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이 미중 갈등 속에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과 달리 일본은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서 미국과의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1980~90년대 반도체 강국의 입지를 되찾고 싶은 일본이 지정학적 강점을 철저히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3일(현지 시각)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일본 경제산업성이 반도체 관련 23개 품목을 수출관리 규제 대상에 추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한다”면서 “7월 23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고 보도했다. 이 명령에는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으로 활용하는 극자외선(EUV) 공정과 액침 노광장비 제작에 필요한 설비 및 식각장치(반도체 원판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장치)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기업이 이들 품목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개별 건마다 경제산업성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특정 국가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으로의 수출을 정부가 나서 전면 통제하겠다는 의미이다.
일본의 이번 규제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만큼이나 치명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첨단 장비는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반도체 공정이 복잡해지면서 장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첨단 반도체 생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재 미국은 중국에 대해 16나노 공정 미만의 첨단 반도체만을 규제하고 있지만, 노광 장비 같은 일본의 수출 규제가 현실화되면 45나노 공정 등 범용 반도체에도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조치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기업들에서 반도체를 공급받으면서 동시에 중국 반도체 업체들의 경쟁력을 키우려는 중국 당국의 계획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매체 차이신은 “중국은 일본 반도체 장비의 주요 고객으로 2021년에만 299억달러(약 39조5000억원)어치를 수입했다”면서 “이는 일본 장비 수출의 40%에 해당하는 수치로, 미국(15%)보다 훨씬 큰 시장”이라고 보도했다.
중국 외교부는 “수출통제 조치를 남용하는 것이자 자유무역 규칙을 심각하게 위배하는 것”이라고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