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핵심 기술로 지정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설계 자료를 빼돌려 중국에 똑같은 ‘복제 공장’을 지으려 했던 전직 삼성전자 임원이 구속됐다. 해당 인물은 ‘메모리 반도체 공정(工程)의 달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제조 분야의 권위자다. 삼성전자를 거쳐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에서 사장 후보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본인의 영향력을 활용해 중국에 삼성, 하이닉스 출신 반도체 핵심 인력을 200여 명 영입했고, 중국계 자본을 투자받아 삼성의 기밀로 공장까지 지으려다 덜미가 잡혔다. 반도체 업계에선 “충격적인 사건”이란 반응이 나온다.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부장 박진성)는 12일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설계 자료를 사용해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고 한 최모(65)씨를 산업기술보호법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영업 비밀 국외 누설)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또 이에 적극 가담한 전직 삼성전자 및 삼성 계열사 직원 5명, 전직 삼성전자 협력업체 직원 1명 등 총 6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2018년 대만의 한 전자 제품 생산·판매 업체에서 8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정받아, 중국 시안(西安)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불과 1.5㎞ 떨어진 곳에 ‘복제 공장’ 건설을 시도했다. 다만 대만 업체의 8조원 투자가 불발되면서 실제 건설로까진 이어지지 않았다. 또 2020년엔 중국 청두시로부터 4600억원을 투자받아 반도체 제조 공장을 짓고, 지난해 연구개발(R&D)동을 완공해 삼성 반도체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 시제품까지 생산했다.
검찰은 지난 2019년 8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해당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착수했지만, 최씨가 장기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수사가 일시 중단됐다. 지난 2월 병원 치료 등을 이유로 최씨가 입국하자 수사가 재개됐고, 지난달 결국 그를 구속했다. 최씨는 현재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고, 함께 기소된 인물들 중 일부는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최소 3000억에서 최대 수조원 가치의 반도체 국가 핵심 기술과 영업 비밀이 침해된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삼성전자를 타깃으로 한 이번 사건은 범행 가담자와 규모, 피해가 이전 기술 유출 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하다. 산업훈장까지 받았던 최고 기술자가 중국 정부의 투자를 받아 회사를 세우고 ‘최소 2배 이상의 연봉’을 앞세워 영입한 삼성·하이닉스 직원들을 통해 ‘친정’의 기밀을 빼내 똑같은 공장을 중국에 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범행 주도자가 반도체 업계에선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매우 유명한 인물인 데다, 개별 기술을 유출하려는 게 아니라 아예 공장을 통째로 복사해 지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반도체 수율의 달인'으로 꼽혔던 인물
12일 검찰에 따르면, 최씨와 그 일당이 삼성전자에서 빼낸 기술은 크게 세 가지다. 국가 핵심 기술인 반도체 공장 BED(Basic Engineering Data)와 공장 설계도면, 공정 배치도다. BED는 반도체 제조가 이뤄지는 ‘클린룸’을 불순물이 존재하지 않는 최적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환경 조건 자료다. 공정 배치도엔 반도체 제조의 핵심 8개 공정 배치와 면적 등 정보가 담겼다. 검찰은 “BED와 공정 배치도는 30나노 이하급 D램과 낸드플래시 반도체 제조 관련 기술로 국가 핵심 기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삼성의 기밀을 빼돌렸다. BED는 2012년 삼성전자를 퇴사한 직원이 근무 당시 몰래 훔친 것으로 조사됐다. 공장 설계 도면은 중국 시안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감리회사 직원이 빼돌렸다. 공정 배치도는 정확한 유출 경위를 검찰이 조사 중이다. 검찰은 최씨가 영입한 직원들에게 “삼성전자 자료를 입수해 활용하라”는 적극적인 지시를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씨는 ‘메모리 반도체 공정의 최고 전문가’로 불릴 만큼, 국내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제조 분야의 권위자다. 1984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8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세 차례나 받았다. 2001년 하이닉스로 옮긴 뒤 기존 장비와 공정 프로세스를 완전히 뜯어 고쳐 제조 원가를 낮추고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리는 혁신을 일궈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이닉스가 2002년 유동성 위기로 미국 마이크론에 매각될 뻔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가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을 찾아가 반도체 공정 도면을 내보이며 ‘투자를 최소화하면서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다’고 설득해 매각을 막은 사례도 유명하다. 최씨가 하이닉스로 옮긴 이후, 삼성이 수율(收率·반도체 생산품 중 정상품 비율)과 제조 원가 측면에서 하이닉스에 일시적으로 뒤처지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건희 회장이 삼성 경영진을 강하게 질책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최씨는 하이닉스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부사장)를 지냈고, 사장 후보군에도 이름을 올렸다가 2010년 퇴직했다.
◇”핵심 기술자 몇 명이면, 반도체 공정 그대로 구현 가능”
최씨는 이 같은 반도체 노하우와 명성을 바탕으로 중국 등지에서 ‘반도체 컨설팅 전문가’로 활동해왔다. 지난 2015년 대만의 한 기업으로부터 약 8조원 규모의 투자 약정을 받아 싱가포르에 반도체 컨설팅 업체를 세운 것이 시작이다. 이 컨설팅업체는 2020년 중국 청두시로부터 4600억원을 투자 받아 반도체 합작 공장을 지었고, 삼성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 시제품까지 생산했다. 최씨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국내 반도체 전문 인력 200명 이상을 국내보다 2배 이상의 연봉과 파격적인 조건으로 이 회사에 영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5월엔 이 회사가 개발한 19나노 D램이 ‘기술적 돌파’를 했다며 중국 반도체 굴기의 큰 진전이라는 현지 언론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최씨 측 변호인은 “최씨는 ‘직접 기술을 유출한 적이 없고, 직원들에게 불법 자료를 이용해 공장을 설립하라고 한 적도 없다’는 입장”이라며 “기술 유출 사실을 들킨 일부 직원이 자신을 끌고 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씨와 한국의 핵심 전문가 몇 명만 있으면 사실상 설계도가 없어도 반도체 공정의 모든 것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을 정도”라며 “이 같은 기술 유출이 계속되면 국내 반도체 산업은 회복 불가능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