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의 3대 만화상으로 불리는 아이스너·링고·하비 상(賞)은 모두 한 작품이 석권했다. 뉴질랜드 작가 레이철 스마이스(37)가 네이버웹툰의 해외 플랫폼 ‘웹툰(WEBTOON)’에서 연재하고 있는 ‘로어 올림푸스’가 주인공이다. 그리스 신화 속 지옥의 왕 하데스와 여왕 페르세포네의 사랑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스마이스는 “2018년 사립 여학교 일을 그만두고 한국 회사에 만화를 연재한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끔찍한 생각’이라고 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뉴질랜드 인구(523만명)보다 많은 구독자가 내 작품을 본다”고 말했다. 로어 올림푸스의 영미권 구독자는 640만명, 누적 조회 수는 13억회에 달한다.
한국에서 시작된 웹툰 플랫폼은 전 세계 작가를 발굴하고, 유명 작품이 필수적으로 거쳐가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네이버웹툰은 작년 미국 월간 활성 이용자 규모가 1250만명을 돌파했다.
◇새 시장 개척한 네이버, 종주국 장악한 카카오
지난 2014년 첫 미국 진출 당시 네이버웹툰은 찬밥 신세였다. 매일 작가들에게 연재 요청 메일을 수백통씩 보냈지만 회신은 없었다. 이신옥 네이버웹툰 북미 서비스 총괄 리더는 “인기 작가 섭외를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사인을 받은 뒤 편지와 명함을 남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네이버웹툰은 2020년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는 승부수를 띄웠고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장조사 업체 센서타워에 따르면 네이버웹툰 소비자 지출액이 가장 많은 국가는 한국(35.4%)이 아닌 미국(36.9%)이다. 미국 대표 만화인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 작품도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된다.
‘만화 종주국’ 일본에선 한국 카카오의 현지 법인 카카오픽코마가 독주하고 있다. 카카오픽코마는 2016년 일본에 만화 앱(픽코마) 서비스를 출시했고, 4년 만에 일본 디지털 만화 앱 매출 1위를 달성했다. 현재까지 누적 앱 다운로드 4000만건에 월간 활성 이용자 1000만명을 확보했다. 일본 만화 앱 시장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해외 시장에 판 깔아주고 유통 장악
한국 업체가 콘텐츠 강국 미국과 일본 시장을 장악한 이유는 현지에 맞는 공략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네이버웹툰은 미국에 진출하며 아마추어 작가가 웹툰을 연재할 수 있는 공간인 ‘캔버스(CANVAS)’를 도입해 현지 작가를 적극 발굴했다. 현재 캔버스 영어 서비스엔 12만명이 넘는 미국 작가들이 활동한다. 구독자 470만명의 인기 웹툰을 연재 중인 스테파니 킴코는 “(미국 만화계에선) 애니메이션이나 아트 스쿨 출신이거나, 마블·DC와 일하지 않으면 기회 자체가 없다는 인식이 많았다”며 “네이버웹툰은 이런 편견을 깼다”고 말했다.
카카오픽코마는 일본 만화 유통 시장을 정밀하게 분석했다. 재미있는 작품을 가진 출판사를 집요하게 공략했고,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마련했다. 권(卷) 단위 단행본 중심의 유료 콘텐츠 구매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에겐 작품을 회차 단위로 쪼개 시간에 따라 일부를 무료로 공개하는 픽코마 방식(기다리면 무료)이 주효했다.
한국 웹툰 플랫폼 업체들은 선두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다. 애플과 아마존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추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아이폰·아이패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자책 플랫폼 애플북스는 지난 4월 일본 이용자를 대상으로 ‘세로로 읽는 만화’ 메뉴를 신설했다. 올 3월에는 아마존이 일본에서 ‘아마존 플립툰’이란 웹툰 서비스를 시작했다. 국내 업체들은 이에 맞서 유럽, 동남아 등 다양한 시장에 진출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