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주권 쟁탈전은 인공지능(AI) 분야뿐 아니라 테크 산업 전반에서 치열해지고 있다. 각국 정부가 자국 기업이 해외에 팔려 나가는 대형 인수합병(M&A)을 적극적으로 막는 동시에, 자국에 장기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해외 기업 간 M&A에도 딴지를 걸고 있다. 오랜 기간 테크 산업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M&A의 씨가 마르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지난달 18일 ‘포토샵’으로 유명한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어도비는 디자인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피그마와의 26조원대 합병 계획을 취소했다. 유럽연합(EU)과 영국 경쟁 당국이 두 회사의 합병이 디자인 소프트웨어 시장에 심각한 독점을 초래할 수 있다며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 당국은 영국에서 어도비의 유일한 대항마로 존재하는 피그마가 M&A를 통해 한 회사로 합쳐지면, 영국 디자인 소프트웨어 분야의 혁신이 저해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소프트웨어 기업 M&A 사상 최대 규모의 딜은 취소됐고, 어도비는 1조원이 넘는 위약금을 물게 됐다.

세계 3대 게임 콘솔인 ‘엑스박스’를 운영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도 어려운 심사 과정을 거쳤다. ‘콜 오브 듀티’,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 등으로 유명한 게임사가 MS와 합쳐지며 게임 시장을 일방적으로 장악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MS는 최종 인수 승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블리자드의 인기 게임을 경쟁사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등에서 즐길 수 있게 하고, 클라우드 게임 스트리밍 권한을 프랑스 게임사 유비소프트에 매각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MS의 블리자드 인수 목표였던 ‘게임 제국’과는 거리가 있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반도체 제조에 대한 주권 경쟁도 거세다. 그동안 반도체 생산을 전적으로 한국·대만·중국 등에 의존해왔던 미국과 유럽이 공급망과 생산력을 내제화하기 위해 기업들을 불러들일 보조금 전쟁에 돌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반도체법을 통해 520억달러(약 68조원)의 반도체 보조금을, 유럽은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430억유로(약 61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내놨다. 반도체 부품 등 풀뿌리 기업부터 설계·제조 대기업까지 자국으로 유치하겠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