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잉크 기반의 스마트폰으로 흑백의 단순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영상 시청은 어렵지만 전화나 메시지 등 스마트폰의 기본 기능은 사용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SNS)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디지털 디톡스’가 떠오르면서 전자잉크 기술을 활용한 기기가 주목받고 있다. /미니멀컴퍼니 제공

서울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최모(33)씨는 퇴근 후 곧바로 침대에 눕는다. 그는 잠들 때까지 스마트폰으로 숏폼 영상을 훑어본다. 최씨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의미 있게 시간을 써보기 위해 지난달 전자잉크 기반의 전자책을 샀다”고 했다.

짧은 동영상인 숏폼 콘텐츠 중독이 사회 문제로 지목되면서 ‘전자잉크(E-Ink)’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영상 시청은 무리지만 메시지나 책 등 글자를 읽는 데 적합한 전자잉크의 특성이 디지털 디톡스 유행에 맞춰 트렌드로 떠오르는 것이다. 2000년대부터 활용되기 시작한 전자잉크 기술은 종이를 대체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최근엔 전자잉크 기반 기기를 찾는 수요가 늘면서 전자잉크 시장 규모는 2024년 26억1000만달러에서 2029년 51억4000만달러로 두 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픽=박상훈

◇소비 전력 적고, 눈 피로도 적어

‘전자잉크’는 디스플레이의 한 종류다. 1997년 미 매사추세츠 공대(MIT) 미디어랩에서 분사한 ‘이잉크(EInk) 코퍼레이션’이 개발한 상품명에서 유래했다. 전자잉크 디스플레이는 두 개의 전극 사이에 마이크로캡슐 수백만 개를 채워 넣어 만들어진다. 사람 머리카락 굵기 정도인 마이크로캡슐엔 음전하를 띠는 검은색 입자와 양전하를 띠는 흰색 입자가 들어 있다. 디스플레이와 가까이 있는 위쪽 전극에 양전하를, 아래쪽 전극에 음전하를 가하면 반대 전하를 지닌 검은색 입자가 위로 가고 흰색 입자가 아래로 향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픽셀이 흰색과 검은색으로 구성되며 글씨나 그림을 표현하게 되는 원리다.

전자잉크의 가장 큰 장점은 소비 전력이 적다는 것이다. 액정표시장치(LCD)처럼 각각의 화소가 빛을 내뿜지 않고 마이크로캡슐 내부의 입자 위치를 바꿀 때만 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2인치 LCD를 20시간 구동하기 위해서는 AA배터리 36개가 필요하지만 같은 크기의 전자잉크는 AA배터리 하나로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디스플레이에 내장된 백라이트가 없어 장시간 디스플레이를 봐도 눈의 피로를 덜 수 있다. 반면 단점도 명확하다. 마이크로캡슐 내부 입자의 움직임으로 색을 표현하는 만큼 화면 전환 속도가 느리고 잔상이 남는다. 빠르게 화면이 바뀌는 영상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디지털 디톡스로 뜨는 전자잉크

그동안 전자잉크는 이러한 기술적 한계 때문에 활용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최근엔 흑백 표현만 가능했던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기술이 적용되면서 전자잉크가 다양하게 활용되는 추세다. 노르웨이의 ‘리마커블’, 중국의 ‘오닉스’ 등 전자책 판매 업체들은 전자잉크 기술을 활용해 한 번 충전하면 오래 사용하면서 더 선명한 화면을 제공하는 전자책을 내놓고 있다. 특히 오닉스는 전자잉크 전자책 화면을 10인치 이상으로 키워 태블릿처럼 활용할 수 있게 하고 마이크로캡슐 안에 삼원색의 입자를 넣어 컬러로 콘텐츠를 나타낼 수 있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전자책을 출시하기도 했다. 시장조사 업체 모르도인텔리전스는 “전자책이 실제 책을 읽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면서 글로벌 전자책 시장은 2029년까지 연평균 4.78%씩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자잉크는 전자책을 넘어 스마트워치나 스마트폰 등 다양한 전자기기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영상 시청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오히려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장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 하이센스는 지난해 전자잉크 기반의 스마트폰 ‘A9 프로’를 출시했다. 최소한의 기능만 갖췄지만, 전자책으로 사용하기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주목을 받았다. IT 스타트업 미니멀컴퍼니는 전자잉크 기반의 ‘미니멀 폰’ 디자인을 최근 공개했다. 쿼티 자판을 갖춘 미니멀 폰은 흑백의 단순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전자잉크의 특성상 영상 시청에는 무리가 있지만 전화나 메시지, 메모와 같은 기본 기능과 음악 플레이어와 우버 등 간단한 어플을 활용할 수 있다. 기존 스마트폰보다 배터리 전력을 덜 사용하기 때문에 4000mAh 배터리로 4일을 사용할 수 있다. 미니멀컴퍼니는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 등 필수 작업을 하면서도 소셜미디어의 장기적인 사용을 방지하도록 설계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