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이 15일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비관적인 내년 전망치를 내놓았다. 거대한 공장과 고가의 첨단 장비들이 필요한 반도체 제조업 특성상, 장비 업체의 실적은 반도체 경기를 미리 전망할 수 있는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 ASML은 “인공지능(AI)을 제외한 다른 반도체 분야 수요 회복이 더뎌 글로벌 반도체 제조 업체들이 EUV 주문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반도체 경기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투자를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대역폭메모리(HBM) 같은 AI 반도체 이외에 범용 메모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의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쳐, 반도체 시장에서 제품별 양극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ASML발 반도체 쇼크
ASML은 이날 3분기 매출 74억6700만유로(약 11조870억원), 순이익 20억7700만유로(약 3조841억원)를 올렸다고 발표했다. 각각 전년 동기 대비 11.9%, 11.1% 오른 수치다. 당장 3분기 실적은 선방했지만, 시장을 실망시킨 건 각종 세부 실적과 전망치였다. 이날 ASML이 제시한 내년도 매출 예상치는 300억~350억유로(약 44조5077억~51조9256억원). 시장 전망(361억유로)에 못 미치는 액수다. 장비 예약 액수도 반 토막이 났다. 이번 3분기 장비 예약 액수는 26억유로로, 시장에서 전망한 56억유로를 크게 밑돌았다. ASML이 만드는 EUV는 버스보다 큰 크기로, 주문 후 실제 수령까지 최소 1년이 소요된다. 이 때문에 주요 고객사가 미리 주문을 하는데, 예약 액수가 줄었다는 건 결국 반도체 업계가 투자 숨고르기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AI 분야에서는 강한 상승이 계속되고 있지만, 다른 시장 부문들은 회복에 시간이 걸리고, 이는 내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에서 고객들의 확장 속도가 둔화돼 장비 도입 시점이 뒤로 밀리고 있다”고 했다. 실제 반도체 업계의 투자 계획은 잇따라 미뤄지고 있다. 파운드리 적자에 허덕이는 인텔은 유럽 등 공장 확장 계획을 백지화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 완공 시점을 올해 하반기에서 2026년으로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ASML의 중국 매출도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올해 3분기 기준 ASML의 중국 매출 비율은 47%에 달한다. 2019년 미국의 중국 화웨이 제재와 함께 ASML의 첨단 EUV의 중국 반입은 엄격히 금지돼 왔다. 하지만 구형인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중국에 수출하고 노광장비 유지보수용 부품들을 팔아 매출 규모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 제재 기조에 동참하며 DUV 장비까지 수출 통제를 강화하면서, 이로 인한 매출 타격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반도체, AI만 잘나간다
최근 AI를 제외한 반도체 분야는 수요가 주춤한 상태다. AI 가속기, HBM 같은 AI용 고성능 반도체 수요는 계속 늘고 있지만, 스마트폰·PC 시장이 아직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면서 범용 D램·낸드플래시 같은 비(非)AI 반도체 분야는 전망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범용 D램이 주력 제품인 삼성전자는 이번 3분기 반도체 사업이 주춤하면서 시장 기대치를 밑도는 실적을 냈다.
4분기에는 메모리 반도체 중 범용 D램 가격 상승세는 정체되고, 낸드 가격은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도 나왔다. 대만 트렌드포스는 최근 “범용 D램 가격은 0~5% 상승에 그칠 것이며 낸드 가격은 3~8%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파운드리 공장에서 생산되는 모바일용 반도체도 스마트폰 등의 판매 부진에 실적이 기대치를 밑돌고 있다. 반면 HBM이 포함된 D램 가격과 AI 서버에 주로 탑재되는 기업용 SSD(낸드로 만드는 대용량 저장장치)는 각각 8~13%, 0~5%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ASML의 실적에 대한 실망감으로 반도체 업계 주가도 하락했다. ASML 주가는 실적 발표 후 16.26% 폭락했고, 미국 엔비디아는 전일 대비 4.69%, 인텔과 AMD도 3% 넘게 하락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도 전날보다 각각 2.13%, 2.18% 떨어졌다.
☞ASML과 EUV 노광 장비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반도체 장비 제조 업체. 첨단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만드는 유일한 기업이다. EUV 노광 장비는 반도체 웨이퍼 위에 극자외선을 쪼아 나노(10억분의 1)미터 단위로 회로도를 그리는 장비다. 한 대당 가격이 현재 주력 제품은 약 2500억원, 차세대 제품은 약 5000억원에 이른다. TSMC·삼성전자·인텔 등이 ASML의 주요 고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