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상거래에서 거대 플랫폼의 불법·편법 행위를 제재하는 한국의 ‘플랫폼 규제법’에 대해 미국이 전방위 압박을 하고 있다. 구글·애플·메타(페이스북 모회사) 등 자국 빅테크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미국 주요 싱크탱크(정책 연구소)부터 재계 단체, 차기 트럼프 정부 핵심 관료까지 나서 “역차별” “한미 관계 긴장 요소”라며 입법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 한국 정부와 국회가 추진 중인 ‘플랫폼 규제법’은 미국 빅테크뿐 아니라 한국 플랫폼까지 포함해 독점적 지위로 소비자와 소상공인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을 규제하는 게 골자다. 이런 한국의 정책에 대해 미국이 노골적으로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 표명을 넘어 자국 기업 보호를 명분으로 한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플랫폼 규제법에 대한 미 전방위 압박
미국 워싱턴DC 소재 싱크탱크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은 지난 9일 ‘한국이 새 디지털 플랫폼 법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20페이지짜리 보고서에서 “한국 플랫폼 규제법이 차기 미국 정부 기조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ITIF는 미국 첨단 기술 분야 최고 싱크탱크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이 매년 꼽는 글로벌 싱크탱크 순위에서 기술 정책 분야 1위를 차지하며 미국의 디지털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ITIF는 보고서에서 “유럽의 규제(EU 디지털시장법)에서 영감을 얻은 한국의 플랫폼 규제법은 부당한 (시장)개입으로 미국과 맺은 관계를 긴장시키며 중국에 문을 열어줄 위험이 있다”며 “한국은 주요 미국 기업에 해를 끼치는 정책을 용납하지 않을 새 행정부(트럼프 정부)의 반발에 직면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한국의 ‘플랫폼 규제법’이 트럼프 정부 때 양국 갈등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ITIF만이 아니다. 300만 기업 회원을 둔 미국 최대 재계 단체 미국상공회의소는 지난 17일 입장문에서 “한국의 플랫폼 규제법이 통과되면 특정 기업을 표적으로 삼고,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제3국에 있는 경쟁 기업은 제외된다”고 밝혔다. 미국 플랫폼을 표적으로 삼은 법안이라고 단정하며 입법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미국이 입법에 반대하는 플랫폼 규제법은 지난 10월 공정거래위원회와 여당이 발의한 ‘플랫폼 공정 경쟁 촉진법’, 22대 국회 들어 야당 의원들이 발의한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을 말한다. 두 법안은 시장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를 사후 또는 사전에 지정해 자사우대·끼워팔기·멀티호밍 제한(입점 업체 타사 플랫폼 이용 제한) 같은 불공정 행위를 제재하는 것이다. 불법·편법 행위가 적발되면 최대 매출액의 8%를 과징금으로 물리는 등 거대 플랫폼에 대한 제재를 신속하게 추진해 소비자와 소상공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골자다.
ITIF 등 미국은 한국 시장에서 미국의 빅테크뿐 아니라 네이버·쿠팡 같은 거대 플랫폼이 함께 경쟁하는 만큼, 플랫폼 규제법이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온라인 상거래와 앱 장터(모바일에서 앱을 내려받는 곳)에서 일부 플랫폼의 독점력이 강화되는 만큼 입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크다. 한 업계 관계자는 “플랫폼 규제법인 국내에서도 입법 필요성을 둘러싸고 찬반 입장이 갈린다”며 “결국 국내에서 치열한 토론을 거쳐 최종 결정해야 하는 사안인데, 미국이 일방적으로 압력을 넣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미국의 지나친 간섭이 오히려 국내 플랫폼 경쟁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국내 플랫폼 업계 관계자는 “미국 주장과 달리 국내에선 오히려 플랫폼 규제법이 해외에 서버를 두고 배짱 부리는 해외 플랫폼은 못 건들고 국내 플랫폼만 처벌하는 역차별 문제로 번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며 “미국의 간섭까지 더해지면 구글·애플 등 미국 빅테크의 국내 시장 횡포는 심해지고,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국내 플랫폼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구글·애플 등은 사업을 관할하는 법인이 해외에 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매출 등 경영 정보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다.
◇한·미 통상 마찰로 이어지나
더 큰 문제는 미국의 이런 주장이 실제 미국 통상 정책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달 26일 미국 무역·관세 정책을 총괄하는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제이미슨 그리어 전 USTR 비서실장을 공식 지명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도 관여한 인물로 “모든 무역협정은 미국의 필요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극단적 보호무역론자로 평가받는다. 지난 1월 미국 투자 전문 매체 배런스에 “한국의 플랫폼 규제법은 중대한 분쟁을 일으키고 무역 대립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커 충돌을 피하기 위한 한국 당국의 주의를 촉구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달 16일 가진 본지 인터뷰에서도 “미국이 막대한 무역 적자를 감수해가며 한국과 경제적 관계를 확대했는데 그 반대급부로 받아 드는 것이 미국 플랫폼 회사들에 대한 가혹한 차별이라면 이건 끔찍한 그림”이라고 말했다.
최근 미국 빅테크와 트럼프 당선자의 밀월로 플랫폼 규제법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플랫폼 업계 관계자는 “과거 1기 트럼프 정부의 행태를 감안하면, 트럼프 2기 정부도 빅테크를 노골적으로 대변하며 한국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에서 미국 빅테크의 횡포가 더 심해질 우려가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