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인천 송도에서 한 소형 SUV가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다가 보행 신호를 지키지 않고 무단 횡단하던 자율 주행 로봇과 충돌했다. 언뜻 보면 단순 대물 접촉 사고지만, 차량 운전자는 이후 사고 처리 과정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율 주행 로봇은 보행자로 인식되기에 운전자 과실도 있다고 한다”는 게시글을 올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보험 처리 과정에서 운전자 과실 이야기가 나온 것은 자율 주행 로봇의 법적 지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난 로봇은 국내 스타트업 뉴빌리티가 개발한 실외 배달 업무용 자율 주행 로봇 ‘뉴비’다. 이 로봇은 인공지능(AI)이 탑재돼 있어, 카메라로 주변을 인식하며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정해진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뉴빌리티는 올해 1월 보도 주행을 위한 ‘실외 이동 로봇 운행 안전 인증’을 국내 최초로 취득했다. 이 인증은 작년 11월 발효된 ‘지능형 로봇 개발 및 보급 촉진법(지능형로봇법)’에 따른 것으로, 이 법과 도로교통법에 따라 자율 주행 로봇에 법적으로 보행자 지위를 부여한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무단 횡단에 대한 주의 의무를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에게 부여하고 있다. 무단 횡단 보행자와 사고가 났다 해도 운전자에게도 법적 책임을 묻는다. 한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는 “사고 영상을 보면 차량 운전자가 사고 직전 횡단보도 정지선을 한참 넘어와 정차하다 보니 바로 옆에 있는 미취학 아동 크기의 로봇(높이 약 130cm)을 발견 못 한 것 같다”며 “무단 횡단을 했다고 해도 운전자 과실이 전혀 없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경찰청 관계자는 “관련 인증을 받은 자율주행 로봇은 도로교통법상 보행자 보호 의무의 객체가 되는 건 맞다”면서도 “실제 사고가 났을 때는 사람이 아닌 만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업무상 과실치사상에 해당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뉴빌리티 측은 이번 사고에 대해 운전자의 책임도 있다는 입장이다. 거듭 정지선을 넘어온 차량들 때문에 자율 주행 로봇의 시야가 가려져 신호등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탓에 로봇이 멈추고, 관제 센터 직원이 로봇 통제권을 넘겨받아 조종하게 됐다. 이 직원은 로봇에 탑재된 카메라로 무단 횡단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녹색 신호등이 켜진 줄 착각해 원격으로 로봇을 이동시켰고, 그러다 사고가 났다. 뉴빌리티 관계자는 “현재는 SUV 운전자와 모든 합의를 마쳤다”며 “전례 없는 사고인 만큼 유관 부서에 보고하고, 개선·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배송 로봇뿐 아니라 집안일을 대행하는 집사 로봇, 친구 역할을 하는 반려 로봇 등 일상 영역에 들어오는 서비스용 로봇이 많아지는 만큼 관련 사건·사고는 더 빈번해질 전망이다. 한국로봇산업진흥원이 지난 20일 발표한 ‘2023년 로봇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비스용 로봇 매출은 1조456억원으로 전년 대비 6.4% 늘며 제조업용 로봇(0.5%)보다 성장 폭이 훨씬 컸다.
가령 뉴빌리티와 함께 ‘실외 이동 로봇 운행 안전 인증’을 취득한 또 다른 로봇 전문 기업 ‘로보티즈’는 수도권 일대 아파트 단지에서 자율 주행 로봇을 활용한 세대 앞 배송 실증 사업을 진행 중이다. 자율 주행 로봇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집 앞까지 물건을 배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달한 것이다. 로봇 업계 관계자는 “자율 주행 로봇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관련 법과 제도에는 허점이 많다”고 했다.
해외에선 로봇의 법적 지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로봇 배달 서비스가 상용화된 미국에선 2016년 실외 자율 주행 로봇 운영을 위한 개인 배달 장치법(PDDA·Personal Delivery Device Act)을 제정하며 보도와 횡단보도를 다닐 수 있는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유럽의회는 더 나아가 2017년 인공지능 로봇에 ‘전자 인간’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7년 세계 최초로 인간형 로봇 ‘소피아’에 시민권을 부여해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