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올해 반도체 수장을 교체하며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시간을 보냈지만, 새해 뚜렷한 사업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내년에는 중국 업체들의 범용 반도체 물량 공세,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부담, 표류 중인 반도체 특별법 등 국내외 환경이 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증권사들은 삼성전자 실적 전망치를 잇따라 낮추고 있다. 30일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가 예상한 내년 삼성전자 영업 이익 전망 평균치는 40조4845억원이다. 4개월 전인 8월 전망치(63조5962억원)와 비교하면 36.3%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적 전망을 극복하기 위해선 내부적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인공지능(AI) 반도체에서 성과를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연구개발(R&D) 인력에 대한 주52시간 예외 적용 등 반도체 특별법을 포함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당선 뒤 전망치 20% 낮아져
삼성전자 실적의 가장 큰 직접적 변수는 중국 업체들의 범용 반도체 물량 공세다. D램 제조 업체 창신메모리(CXMT) 등 중국 업체들이 삼성전자 제품의 절반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고 있다. D램 가격은 올해 여름 이후 하락하기 시작, 11월에도 PC용 D램 범용 제품의 평균 가격은 전달보다 20.6% 하락한 1.35달러에 그쳤다. 신년에 중국 반도체의 공세는 더 거세질 전망이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중국의 물량 확대로 내년 D램 생산량은 올해보다 25%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 센터장은 “내년 D램 시장과 낸드 시장 모두 녹록지 않을 것”이라며 “내년 삼성전자 영업 이익은 33조원으로 올해 영업 이익보다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증권사들의 삼성전자 영업 이익 전망치는 올해 35조원에서 내년 40조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집계됐지만, 유진투자증권 등 일부 증권사는 감소할 것으로 봤다. AI 붐으로 인한 반도체 시장의 상승세에 올라타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에 유리하도록 관세정책을 펼치겠다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내년 1월 출범한다는 점도 부담이다. 높은 관세로 인한 가격 상승으로 삼성전자 반도체가 들어가는 스마트폰과 PC 판매가 부진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두 달간 삼성전자 영업 이익 전망치는 20%가량 낮아졌다. 증권 업계 관계자는 “내년 삼성전자 실적은 변수가 많아 어느 때보다 난도가 높다”며 “그만큼 삼성전자 반도체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크다는 의미”라고 했다. 실제 증권가에서 삼성전자 영업 이익 전망치는 현재 최대 55조원, 최소 24조원으로 증권사 간 격차가 30조원 이상이다.
◇기강은 잡고 있지만, 제도적 뒷받침 필요
범용 반도체와 달리 AI 반도체 시장은 내년에도 성장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분야에선 삼성전자가 아직 경쟁사를 넘어설 만한 기술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올해 안에 가능할 것이라던 엔비디아 HBM3E 공급은 내년으로 미뤄졌다.
삼성전자는 기술 리더십 회복을 위해 내부 기강 다잡기에 나섰다. 지난 5월 원 포인트 인사로 DS(반도체 사업부) 부문장에 전영현 부회장이 부임한 후, 느슨해진 조직 문화를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전 부회장의 지시로 그동안 해이해진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비공식 조직을 만든 것으로 안다”며 “경영진의 요구가 일선 직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원인을 파악하고 해법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 부회장은 지난달에는 DS 소속 임원들과 다섯 차례에 걸쳐 끝장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 임원은 “우리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임원들에 대한 강한 질타가 이어졌다”며 “이후 조직 전체적으로 기술적 문제를 깊게 파고들어 해결하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을 52시간제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 표류가 삼성의 기술력 회복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당은 이 법이 통과될 경우 주52시간제의 골격이 흔들린다며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주52시간제 적용 예외 대상’은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전체 직원 7만5000명 중 약 9% 수준인 7000명에 그친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고위 임원들이 야당 의원을 찾아 반도체 특별법 국회 통과를 설득하고, 김용관 삼성전자 사장은 26일 직접 “반도체 산업 발전과 국가 경제 기여를 위해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 등 최첨단 반도체일수록 고객사 요구에 따라 R&D 인력이 붙어 치열하게 개발하고 일해야 한다”며 “여러 사람을 투입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