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진경·Midjourney

국내 대형 로펌에서 기업 소송과 자문을 담당하는 변호사 박모씨는 업무 방식의 변화를 실감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적어도 5년 차 경력까지는 관련 판례를 정리하고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업무 시간 대부분을 쏟아부었는데, 오픈AI의 챗GPT와 퍼플렉시티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하면서 거의 자동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 측의 서면에서 쟁점을 추출하는 데는 회사 내부 AI를 쓰고, 간단한 사건은 AI로 서면 초안을 손쉽게 작성한다”며 “AI 덕분에 업무 시간을 절반 이상 단축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17일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슈퍼 휴먼의 슈퍼 워크: AI-인간 시너지가 만드는 일의 의미와 미래’ 포럼에서 산학계 전문가들은 “화이트칼라 근로자들의 직업을 개별 과업과 활동으로 ‘분해’ 또는 ‘해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변호사의 경우 판례 검색 등 AI로 자동화가 가능한 과업과, 대체가 어려운 비정형적 과업을 구분하고 후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포럼은 태재미래전략연구원이 주최하고 태재대학교와 태재연구재단, 조선일보가 공동 주관했다.

그래픽=양진경

◇“AI와 협업해 사고력·창의성 확장해야”

이날 ‘인공지능 시대의 미래의 일’이란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대니얼 서스킨드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정치경제학부 교수는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과업들을 수행하는 AI가 등장하면서 5~10년 후에는 자동화가 어려운 과업을 해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문직의 미래’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등 저서로 유명한 서스킨드 교수는 “학창 시절의 이른바 초기 교육(학벌)으로 형성한 인적 자본을 평생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실수”라며 “불확실성이 큰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선 평생 재교육과 재훈련에 집중하는 의지와 유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건축가의 전유물로 여겨져온 아름다운 건축물도 AI가 설계하는 시대가 왔다며 독일 함부르크의 엘필하모니 콘서트홀을 사례로 들었다. 서스킨드 교수는 “감정과 창의력과 같은 정교한 능력이 요구되는 과업도 AI가 대신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특허 분쟁의 결과를 예측하는 AI 시스템과 피부과 전문의 진단을 돕는 스탠퍼드대 연구진의 AI 시스템도 업무 변화의 사례로 꼽았다. 그는 AI가 창의적 업무도 대체하더라도 인간의 직업(job)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직업을 이루는 과업(task)의 일부가 자동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820개 직업 가운데 5%만 현존하는 기술로 완전히 자동화될 수 있다. 하지만 직업이 아닌 과업 단위로 뜯어보면 전체 과업의 30% 이상이 자동화가 가능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성환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원장은 “A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서 인간의 사고와 창의성을 확장하는 협력자로 발전하고 있다”며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지만, AI를 통해 인간의 잠재력이 더욱 확장되고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기회가 열릴 것이란 전망도 공존한다”라고 말했다.

17일 태재미래전략연구원 주최 포럼에서 참석자들이 대니얼 서스킨드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다. /장련성 기자

◇“AI가 할 수 없는 과업에 교육 집중”

실제 국내에서도 사무직에 생성형 AI 도입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설문에 응답한 기업 50곳을 분석한 결과, 회사 차원에서 AI를 도입한 비율은 38%였다. 직원들이 개별적으로 활용한 사례까지 포함하면 전체의 88%가 AI를 활용하고 있다. 특히 AI를 도입한 기업의 85.7%는 “AI가 업무 시간을 줄였다”고 응답했다.

그러면 사무·전문직은 AI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토론에 나선 이주환 스윗 창업자는 “엔지니어링에서 스킬(기술)은 더 이상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인간은 엔지니어링의 더 깊은 본질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항심 건국대 교수도 “자동화될 수 있는 부분은 AI에 넘기고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굉장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은 “이제 단순 반복적 업무는 AI와 로봇에 맡기고 인간은 AI와 협업해 혁신적 가치를 창출하고 복잡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해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