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국내 한 반도체 업체는 해외 고객사에 제품을 납품했다. 연말 고객사 측에서 다른 부품과 호환 문제로 속도가 떨어진다며 성능 개선을 요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급 연구·개발(R&D) 인력은 회사에 10명이 채 안 된다. 이들을 모두 투입했지만, 한 달가량 소요됐다. 이들이 밤낮없이 매달렸다면 열흘이면 됐을 문제였다. 이 업체 관계자는 “주 52시간제에 걸려 밤에는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빨리 해결해 달라는 고객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래픽=백형선

반도체 주 52시간 예외에 대해 근로자 건강과 함께 “반도체만 특별히 예외로 할 이유가 없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이는 반도체 산업의 특수성을 간과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는 특정 신제품·기술 개발에 약 1년 동안 수천억 원을 투입한다. 개발이 일단 끝난 시점에서 문제점이 발견되거나 고객의 요청 사항이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럴 때는 가용한 인력을 모두 투입해 단기간에 문제를 해결해야 제품 양산에 들어갈 수 있다. 시간이 더 걸려 양산 시점이 늦어지면, 경쟁사에 시장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지난 1년간의 연구·개발 기간과 투자비가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연구·개발뿐 아니라 생산 공정도 문제다. 반도체는 생산을 위해 1000번에 가까운 미세 공정을 거쳐야 한다. 제품 수율 등에 문제가 발생하면 각 공정을 하나하나 살펴야 한다. 이를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기업엔 고스란히 비용으로 돌아온다. 국내 반도체 대기업 엔지니어 A씨는 “기업 입장에선 보조금이나 세금 공제 같은 금전적 지원보다 주 52시간 예외 적용이 훨씬 절실하고 긴박하다”고 말했다.

주 52시간제 도입 후 뒤바뀐 기업 문화도 반도체 업체들엔 큰 부담이다. 반도체 업체 최고위 관계자는 “주 52시간이 정착되면서 이제 퇴근 시간이 되면 하던 일도 멈추고 회사 문을 나가는 게 당연시된다”며 “아무리 열심히 하자고 이야기를 해도 직원들에게 먹히지 않고, 오히려 남아서 더 일하려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을 정도”라고 했다.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최근 본지에 “1980~1990년대 삼성은 세계 1등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분위기가 있었고 1등이 된 후에도 치열하게 일하고 밀어붙이는 벤처 기업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며 “주 52시간 근무제는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도 나태하게 만들어 국가 전체 R&D 기능을 약하게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로 해외의 경우 고소득 R&D 인력에 대해서는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법정 근로시간이 한국처럼 주 40시간이지만, 주 684달러(약 98만원) 이상 버는 고소득자는 근로시간 적용에서 제외된다. 일본도 연 1075만엔(약 1억209만원) 이상 버는 R&D은도 법정 근로시간 적용을 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