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 연속 세계 1위 삼성 TV’ 신화를 만든 주역 중 한 명인 한종희(63)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25일 심정지로 별세했다. 한 부회장은 인하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1988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30년을 넘게 TV 연구 개발에만 매진해온 ‘정통 TV 엔지니어’다. 2021년부터 TV·가전·스마트폰 등 DX(완제품) 사업부를 총괄하며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맡아 왔다.
삼성 TV가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을 이긴 것은 한국 전자 산업에서 기념비적인 일로 꼽힌다. 삼성 TV 히트작은 대부분 한 부회장의 손을 거쳤다. 삼성전자는 2006년 얇은 패널과 와인잔 모양의 곡선 디자인을 채택한 액정표시장치(LCD) TV인 ‘보르도 TV’를 출시했다. 한 부회장은 LCD TV 랩장으로 개발 실무를 맡아 당시 최지성 사장, 윤부근 부사장과 함께 TV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해에만 300만대가 팔려 나갔다. 삼성전자는 일본 소니를 제치고 TV 1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2014년 출시된 곡선 화면의 커브드 TV, 2015년에 나온 QLED TV 개발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한 부회장의 사업적·기술적 성취는 쉽게 이룬 것이 아니다. 그는 사내에서 ‘코뿔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일에만 집중하는 우직한 성격 때문이다. 동료들과 대화할 때도 TV 개발 등 사업 얘기가 주를 이뤘다. 이력도 그런 별명에 한몫했다. 입사 이후부터 TV를 담당하는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에서 한 우물을 파며 2017년 사업부장(사장)까지 승진했다. 삼성 TV의 세계 1위 타이틀을 수성하며 2021년엔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해 ‘샐러리맨 성공 신화’를 썼다. 스스로도 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의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에는 ‘영원한 1등, 세계 최고’라고 적혀 있다.
한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완제품을 책임지는 DX부문 부회장을 맡고 나서 TV의 성공 DNA를 생활가전과 로봇, 스마트폰 분야에 이식하기 위해 힘썼다. ‘생활가전 통합 전략’을 진두지휘해 왔고, 사업 구조를 통합하고 개편하는 데 주력했다. 지난해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한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 라인업을 선보이며 ‘AI 가전=삼성’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가전 사업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부회장은 별세 엿새 전 열린 주주총회에서 “곧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조리기기 등 많은 신제품을 선보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한 부회장은 기술 개발뿐 아니라 조직 문화를 위해 구성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직원들과 해물탕을 시켜놓고 ‘소맥 회동’을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와 근무했던 한 직원은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판단하는 결단력으로 주변인의 신뢰를 얻는 선배였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임직원들도 갑작스러운 한 부회장의 부고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건강한 모습으로 주주총회를 직접 진행했고, 이후 중국 상하이 가전 박람회 출장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날 전체 공지를 통해 “37년간 회사에 헌신하신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은 TV 사업 글로벌 1등을 이끌었으며, 어려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도 세트부문장 및 DA(가전) 사업부장으로 최선을 다해오셨다”며 추모했다. 중국 출장 중인 이재용 회장은 현지 일정으로 직접 조문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와 애도의 마음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자업계도 고인을 애도했다. 한 부회장이 회장을 맡았던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는 “지난 3년간 KEA 회장을 맡아 전자산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도 이날 “한 부회장께서는 한국의 전자산업 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주셨다”며 “한 부회장께, 삼성전자 여러분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녀 1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7일이다. (02)3410-6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