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투자는 죽었나.’ 이 말에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가치투자자 신봉자들은 “지난 역사를 보라”고 흔히 말한다. 지난 100년간 가치주는 성장주에 비해 낮은 수익률에 외면받다가, 성장주의 거품이 빠지면 성장주 수익률을 뛰어 넘는 패턴이 반복돼 왔다는 것이다. 가치투자에 대한 비난도 마찬가지로 늘 반복됐다. 대표적 가치투자자인 워런 버핏 버크셔 헤서웨이 회장은 1984년에도 컬럼비아대 공개 강연을 통해 “가치투자의 실적은 우연의 산물”이란 주장에 가치투자 지향 외엔 큰 공통점이 없는 펀드 8개의 장기 수익률을 S&P500 지수와 비교하며 반박하기도 했다.
가치투자자들이 선별해내는 ‘가치주’의 정의는 변화해 왔다. ‘가치투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1894~1976)은 1930년 내놓은 ‘증권 분석(Security Analysis)’에 가치투자의 기본 원칙을 적었다. ‘기업의 내재 가치를 평가하고 주가가 기업 가치보다 낮을 때 구매해 차익을 거둔다.’ 신용등급, 부채 비율, PER(주가수익비율), PBR(주가순자산비율) 등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기업 내재 가치를 평가하는 것도 그레이엄이 남긴 유산이다. 그는 순유동자산(1년 안에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에서 1년 안에 갚아야 할 부채를 뺀 것)보다 시가총액이 3분의 2 수준 아래인 주식에 투자하면 투자에 실패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실제 큰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저그런 기업의 싼 주식을 사들여 박리다매식으로 큰돈을 번다는 비판도 받았다. ‘꽁초 줍기식 투자’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레이엄의 저서를 읽고 제자가 되었다는 버핏도 초기에는 그레이엄처럼 기업의 숫자 평가를 바탕으로 저렴한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1950년대 ‘성장주의 아버지’ 필립 피셔가 등장해 성장주 투자 개념이 성공을 거두고, 저평가된 싼 기업 주식을 찾는 방식으로 수익을 거두는 데 한계를 느낀 버핏은 변신을 꾀한다. 버핏의 표현으로 그는 ‘그레이엄(가치주 투자) 85%와 피셔(성장주 투자) 15%’를 따르기로 한다.
기본 원칙은 저평가 우량주를 발굴해 장기 보유하며 성장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업 가치를 평가할 땐 그레이엄식의 양적 평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장 지배력(프랜차이즈 밸류·franchise value)’ 같은 주가 자체와 연동하지 않는 지표의 중요성도 고려했다. 시장 지배력을 갖춘 기업은 경기 부침과 무관하게 꾸준히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버핏의 대표 가치주 코카콜라가 단적인 예다. 대중이 선호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어 대체되기 어렵고, 저렴하게 대량 생산(규모의 경제)할 능력까지 갖췄다.
한국의 대표 1세대 가치투자자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는 “그레이엄 시대의 가치주는 사실에 기반한 지표, 현금·땅이 많고 PBR은 낮은 기업의 주식이었다. 버핏 시대의 가치주는 좋은 사업 모델과 시장 지배력을 갖춘, 미래가 기대되는 기업 주식”이라고 했다. 이어 “가치주의 정의나 조건은 해당 시점의 기업 환경과 투자자 판단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버핏은 그레이엄처럼 제자를 따로 들이진 않았지만 대다수 가치투자자들이 버핏의 후예를 자처한다. 우리에겐 행동주의자로 익숙한 빌 애크먼(퍼싱스퀘어캐피털)도 지난해 “현금흐름이 좋고 예측 가능한 괜찮은 기업을 적절한 가격에 사는 전략으로 돌아왔다”며 “버핏을 멘토 삼아 공부한다”고 했다. 세스 클라만(바우포스트 캐피탈), 리 루(히말라야 캐피탈), 그렉 알렉산더(루앤커니프)도 2010년 한때 차기 버크셔 헤서웨이 CIO 후보로 거론되던 차세대 가치투자자들이다.
실제 버크셔 헤서웨이가 2010년부터 차례로 영입한 건 토드 컴스와 테드 웨슬러라는 무명에 가까운 헤지펀드 매니저들이었다. 영입 당시 각각 39세, 48세에 불과했다. 최근 몇 년 버크셔 헤서웨이는 애플·아마존 등 흔히 성장주로 분류되는 IT기업에 투자해 시장을 놀라게 했다. 이 같은 ‘버핏 답지 않은 투자’는 컴스와 웨슬러가 주도한 것이란 분석이 많다. 가치투자를 지향하는 최준철 VIP자산운용 대표는 “버핏의 뒤를 잇는 가치투자자들 모두 우량 기업의 주가를 적정가에 사들인다는 가치투자의 기본 원칙은 따른다”면서 “가치투자자 각자가 관심을 두는 사업 분야가 무엇인지에 따라 투자하는 기준이나 기업의 면면이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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