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사내 변호사인 박모(34)씨는 정치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회사에 가는 게 두렵다. 정치 성향이 뚜렷한 팀장이 회의시간, 점심시간 가리지 않고 정치 이야기를 꺼내서다. “서울시장 선거가 끝난 다음 날엔 회의 시작 후 20분 동안 혼자 선거 결과에 대해 떠들더라고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는데도요. 팀원 전부 폰만 쳐다보고 있는 걸 진짜 몰랐던 걸까요?”

회사 내 정치 이야기는 직장인들이 꼽는 대표적 직장 스트레스 중 하나가 됐다. 특정 성향의 정치적 입장을 주변에 설파(說破)하려는 사람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이모(32) 대리는 상사가 자기 입맛에 맞는 정치 유튜버 영상과 기사를 업무용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자꾸 공유해 이직까지 고려했다. 그는 “영상이나 기사는 안 보면 그만이라고 쳐도, 자꾸 ‘이 대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서 몹시 곤란했다”며 “업무를 위해 존재하는 대화방에서 왜 정치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 이후 전 세계적으로 정치·사회적 대립이 격화하면서 이 문제로 고민을 토로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아예 일터에서 정치·사회 이슈에 대한 토론을 금지한 기업들이 등장해 논란이 벌어졌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반발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용기 있는 결정”이라며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일러스트= 김영석

◇“사내 분열 조장하는 정치 토론 금지”

지난달 26일 미국 시카고 소프트웨어 업체 ‘베이스캠프(Basecamp)’가 “업무 중 정치·사회적 토론을 금지한다”는 공지를 냈다. 이 회사는 전체 직원이 60명에 불과하지만, 원격근무 관리 협업 소프트웨어 ‘베이스캠프'로 IT(정보기술) 업계에서 꽤 유명한 회사다. 이 회사 창립자 제이슨 프리드는 회사 공식 블로그에 “사회·정치적 주제의 대화는 주의를 산만케 하고 에너지를 약화시키며, 대화를 어두운 곳으로 이끈다”며 “동료와 개인 메신저로 정치적인 대화를 하는 건 상관 없지만, 회사 메신저에서는 업무만 해야 한다”고 했다.

베이스캠프의 결정은 팽팽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직원은 트위터 등에 사직서를 올리며 집단 반발했다. 20명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밝혔고, 회사는 이들에게 6개월치 급여를 더한 특별 퇴직금을 주기로 했다. 외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경쟁사인 아사나(Asana)의 더스틴 모스코비츠 CEO(최고경영자)는 트위터에 “(정치·사회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직원들이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처리할 공간이 필요하다”며 “우리는 이런 유의 대화 공간을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테드 리우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도 “직원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라며 베이스캠프의 결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반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 자 사설에서 “(정치 토론 금지는) 합리적 결정”이라며 “기업은 스스로를 정치적인 광장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가상 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브라이언 암스트롱 CEO도 트위터에 “요즘 이런 결정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며 베이스캠프를 지지했다. 코인베이스는 앞서 지난해 10월 사내 정치적 토론을 금지했다. 암스트롱은 당시 “실리콘밸리에선 회사가 하는 일과 상관없는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게 일반화됐다”며 “의도는 좋지만 대부분의 기업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내부 분열을 조성해 많은 가치를 파괴한다”고 했다. 코인베이스는 전체 직원의 5%에 해당하는 60명이 특별 퇴직금을 받고 회사를 떠났다.

직원들의 사내 정치 토론을 금지한 미국 소프트웨어 업체 베이스캠프의 CEO(최고경영자) 제이슨 프라이드. /제이슨 프라이드 링크트인

◇정치·사회 현안 참여 기업 늘어…“전면 금지는 힘들 것”

코인베이스나 베이스캠프의 조치가 다른 회사로 확대되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기업들이 점점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가는 추세라서다. 미국 기업 CEO들은 지난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이후 신종 코로나 부양책 통과 촉구, 최저임금 인상과 부유세 도입 논쟁, 투표권 제한 법안 반대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프롭테크(부동산기술) 업체 레드핀의 글렌 켈먼 CEO는 WSJ에 “재택근무 확산으로 직업적 삶과 개인적 삶이 혼합되고, 정치적 격변이 줄줄이 일어나면서 직원들에게 업무와 정치적 이슈를 분리하라고 요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직원들의 토론을 전면 금지하는 건 어렵지만, 조직관리 측면에서 정치적 대화가 팀 내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는 있다”고 조언한다. 사내 게시판에서 직원들의 자유로운 토론을 장려해왔던 구글이 직원들 사이에서 인종차별 등 정치적 이슈에 대한 논쟁이 격렬해지자 가이드라인을 새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구글은 사내 토론 그룹(게시판) 운영자들에게 ‘중재자 교육'을 반드시 이수하게 하고, 토론 그룹의 목적이 담긴 헌장(憲章)을 만들어 토론이 헌장에서 정한 범위 내에서만 이뤄지게 했다.

김성수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민감한 정치 이슈에 대한 토론은 구성원을 양극화시켜 팀워크를 해칠 수 있다”며 “지나친 정치 관련 대화는 집단 내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교육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인지하게 하고, 팀 내에 조정자를 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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