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회계 컨설팅 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영국 지사는 일반 직장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회의한다. 고층빌딩 꼭대기 층부터 호화로운 펜트하우스, 스키장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 등 다양한 장소에서 매주 2~3차례 팀 회의를 갖는다. 회의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출장 갈 필요도 없다. 비결은 VR(가상현실)이다. VR 헤드셋을 끼고 다양한 콘셉트의 가상공간에서 직장 동료와 만나는 것이다. 이런 회의를 확대하기 위해 PwC는 수천개의 VR 헤드셋을 구매하고 PC용 캐시 메모리(소형 고속 기억 장치)를 두 배로 늘리는 등 내년까지 7500만파운드(약 12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영국 가디언은 “최고의 기업이 회의를 더 활기차게 하기 위해 VR로 전환하고 있다”고 했다.
◇'줌 피로’ 없애주는 VR 기술
VR이 화상회의의 한계를 딛고 재택근무를 영구화할 수 있는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인력관리회사 로버트 하프가 올 초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89%는 팬데믹 이후에도 재택과 사무실 근무가 혼재된 하이브리드 근무가 영구 유지될 것이라 내다봤다. 팬데믹 종식 이후에도 화상회의는 이어질 거란 뜻이다. 문제는 ‘줌 피로(Zoom Fatigue)’라는 신조어로 대변되는 화상회의 부작용이다. 줌 같은 화상회의 플랫폼은 팬데믹과 함께 필수 업무 도구로 떠올랐지만,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등 여러 부작용이 보고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 3월 낸 ‘업무 동향 지표(Work Trend Index)’ 보고서에서 “원격회의가 2.5배 늘고 업무 이메일이 406억건 늘어났다”며 화상회의로 인해 직장인들이 겪고 있는 ‘디지털 과부하(digital overload)’가 심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가상인간상호작용연구소(VHIL)가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줌 피로의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①모니터에서 마주하는 여러 눈동자들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는 점 ②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 ③모니터 앞으로 제한된 일상 이동성 ④비언어적 의사소통 제한으로 인한 인지 과부하 등이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고 연구소는 분석했다.
최근 출시되기 시작한 업무용 VR 서비스들은 이런 한계점을 보완하며 틈새 시장을 공략 중이다. VR 기기 ‘오큘러스 퀘스트’ 시리즈 제조사로 이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메타(구 페이스북)가 대표적이다. 메타가 지난 8월 출시한 VR 전용 화상회의 서비스 ‘호라이즌 워크룸스’는 오프라인에 있는 컴퓨터 화면과 키보드, 책상을 원격조작 앱으로 연결해 가상공간 안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실시간으로 글씨를 적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형 화이트보드까지 지원해 준다. 대면회의에서 이뤄지는 거의 모든 상호작용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현장 특유의 몰입감까지 재현한 것이다. 메타는 줌과 손잡고 내년 초부터 이 서비스를 줌을 통해 서비스할 계획이다. 이 밖에 AR(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후발 주자도 많다. 업무 협업용 소프트웨어 ‘팀즈’를 서비스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는 지난달(11월) 2일 가상공간과 홀로그램 기술을 적용한 ‘팀즈용 메시’를 발표했고, 화상회의 서비스 ‘시스코 웹엑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IT 기업 시스코 역시 AR 기반의 ‘웹엑스 홀로그램’을 지난달 공개했다.
◇장비 무게와 아바타가 VR 회의 걸림돌
다만 VR 화상회의 기술 역시 넘어야 할 걸림돌이 몇 가지 있다. 우선 VR 헤드셋의 무게다. 최신 VR 헤드셋인 ‘오큘러스 퀘스트2′의 무게는 500g이 넘고 팀즈용 메시에 사용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AR 글라스 ‘홀로렌즈2′ 역시 566g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중형 스마트폰 무게(150~170g)의 3배를 훌쩍 넘는 수준이다. 그만큼 장시간 몰입해 쓰고 있기엔 부담스러운 무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드웨어 기술 발달과 함께 VR·AR 기기의 무게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가상공간에서 자신의 대역으로 사용하는 ‘아바타’가 대인 관계나 업무 효율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 모습과 괴리된 아바타를 사용할 경우 사용자의 심리 상태나 상호작용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직장 상사의 아바타의 모습이나 목소리가 실제 이미지와 다르면 그를 대하는 태도 역시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메타의 메타버스(가상공간)를 연구 중인 서호주대학교의 노엘 마틴 법학교수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디지털 정체성을 수정하고 필터링하고 조작할 수 있다면, 자신의 외모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신체 이형증과 셀카 이형증, 음식 섭취 장애 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아바타의 모습이 개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프로필 사진을 보정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SNS ‘스냅챗’ 때문에 자신의 외모에 이상이 있다고 느끼는 사용자들이 늘면서 ‘스냅챗 이형증(snapchat dysmorphia)’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메타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코덱 아바타’라 불리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머리카락과 피부 등을 정밀하게 렌더링해 사진 수준으로 실제 내 모습과 가까운 아바타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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