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유럽 군비 증강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대를 맞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큰형님’으로 회원국 방위를 책임져주던 미국이 트럼프 정부 들어 각자도생을 요구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 각국이 국방력 강화에 나섰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군비는 방위 산업 업체엔 호재다. 이를 증명하듯 독일 최대 방산 업체로 독일군 주력 전차 레오파르트, 장갑차 링스(Lynx) 등을 만드는 라인메탈의 실적과 주가는 날아오르고 있다. 라인메탈은 특히 전차나 탄약, 로켓, 전투기 동체를 주로 생산한다. 새로운 군비 확장 시대에 라인메탈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 WEEKLY BIZ가 지난 12일 실적 발표회 자료와 이날 녹취록을 바탕으로 유럽 방산 시장의 현재를 진단해 봤다.
◇역대 최고 실적 기록했다
현재 라인메탈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다. 1889년 창사한 라인메탈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2021년 56억5800만유로(약 9조원)였던 매출이 지난해 97억5100만유로로 72% 뛰었다. 아르민 파페르거 라인메탈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발표회에서 “지난해 라인메탈은 예상 목표 매출액 100억유로에 사실상 근접했다”며 “원래 2억5000만유로의 매출을 더 올릴 수 있었으나 배송(선적) 지연으로 매출에 포함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영업이익의 성장세는 더 가파르다. 라인메탈의 영업이익은 2021년 5억9400만유로에서 지난해 14억7800만유로로 2.5배 수준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한 해에만 61% 늘었다.
◇성장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런 성과는 더 큰 성장의 시작일 수 있다. 라인메탈은 실적 발표회 시간의 대부분을 지난해 실적 복기보다는 향후 전망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현재 유럽 방산 업계엔 큰 장이 섰기 때문이다. 결정적 계기는 지난달 뮌헨안보회의였다. 당시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유럽 국가를 향한 날 선 비판과 함께 일종의 훈계를 쏟아냈다. 그는 “현재 유럽의 가치가 미국이 방어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나토에서 미국이 담당하고 있던 안보 역할을 축소할 의사를 보였다는 해석이다. 유럽에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파페르거 CEO는 이 같은 변화를 ‘시대전환(Zeitenwende) 2.0’이라고 불렀다. 그는 밴스 부통령의 ‘훈계’를 언급하며 “유럽은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우리는 시대전환 2.0을 준비해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파페르거는 “뮌헨안보회의를 통해 개인적으로 42명의 총리 및 장관과 회의를 가졌고, 그들은 유럽이 투자할 의향이 있으며 훨씬 더 많이 투자하겠다는 매우 명확한 그림을 우리에게 줬다”고 설명했다.
라인메탈은 향후 6년 동안(2025~2030년) 기대 매출이 3000억유로에서 많게는 4000억유로에 이른다고 전망했다. 현재 수준의 시장 점유율(20~25%)을 바탕으로 한 계산이다. 파페르거는 “이 정도 전망치도 (유럽 각국이) 국방 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5% 수준으로 지출한다고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의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부채 브레이크’가 풀린다
파페르거가 GDP 대비 국방비 지출 비율을 얘기한 이유는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전반에 걸쳐 확산되는 국방비 비율 확대 움직임 때문이다. 특히 라인메탈은 독일의 ‘부채 브레이크(Schuldenbremse)’ 개정안이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기대한다. 독일 차기 총리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는 국방비에 한해서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을 제한해서 안 된다는 내용의 헌법(기본법) 개정 합의안을 발표했는데 이 법이 18일 연방의회에서 가결되면서 국방비 지출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 파페르거는 “메르츠는 시대전환 2.0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고, 그는 국방에 필요한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메르츠 대표나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 등 여러 장관급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2023년 1.6%에서) 최소 3%가 돼야 한다고 말했고, 3.5%까지 늘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며 “3% 수준을 가정할 때 유럽연합(EU)의 국방비 지출은 현재 6900억유로 수준에서 2030년엔 8310억유로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국방예산 비율이 3.5%까지 늘어나면 1조유로까지 늘어날 수 있으며, 규모가 작은 나라는 실제로 국방 예산 비율을 GDP의 3.5%까지 끌어올려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호재였다
라인메탈이 향후 호실적을 낙관하는 이유는 이미 확보해 둔 매출이 많기 때문이다. 납품 비용 정산을 마지막에 하는 경우가 많은 방산·조선·건설 등의 산업에선 수주 잔액으로 향후 매출을 점치고, 이를 중요한 지표로 여긴다. 그런데 라인메탈의 수주 잔액은 계속 느는 추세다. 지난해 수주 잔액만 해도 549억7300만유로로 전년(382억9000만유로)보다 44% 늘었다. 최종 납품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순 있겠지만 어쨌든 들어올 돈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라인메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효과를 제대로 보고 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에서 방공 시스템, 전투 차량, 탄약 생산 공장 등으로 올린 매출만 20억유로에 달한다. 향후 몇 년 동안 연 매출의 13%대를 우크라이나에서 올릴 전망이다.
파페르거는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활약하고 있는 레오파르트 전차, 링스 장갑차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레오파르트에 설치된 방공 시스템은 4㎞ 내의 모든 무인기(드론)를 포착할 수 있고, 드론을 잡는 것은 매우 쉽다. 게임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레오파르트가 러시아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링스는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으로 차량 한 대만 운전하면 서너 대가 따라오는 수준이 됐다”며 “향후에는 60가지 변형 모델로 1000대 이상의 링스를 생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7번 아이언을 드라이버로 고쳐 잡을 때”
라인메탈의 과제는 설비 확충이다. 늘어나는 주문 속에 공장과 인력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파페르거는 실적 발표회 직후 인터뷰에서 폴크스바겐의 공장 매입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의 경기 둔화로 인한 소비 침체와 전기차의 도전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폴크스바겐의 공장을 라인메탈이 사들일 수 있다는 취지였다.
파페르거는 실적 발표회에서도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3년 전에 했던 일보다 훨씬 더 많고 커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설비 확충을 통해)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며 “골프로 비유하자면 7번 아이언에서 드라이버로 고쳐 들어야 할 때”라고 했다. 그는 또 “(주문량이 늘어난다고 해서 판매가 지연되는) 병목 현상은 없을 것이다. 오븐을 늘리면 더 많은 빵을 만들듯이 투자만 더 하면 생산 용량을 늘릴 수 있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공장을 위한 부지 확보나 자재 확보에서도 이미 대비가 돼 있다고 확신하며, 현재 고용 인원 3만2000명을 향후 2년 내에 4만명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라인메탈
독일 최대의 방위산업체. 1889년 4월 창업해 1·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다. 전차나 장갑차에 실리는 포(砲) 생산에서 높은 기술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해 미국·일본 등에서도 라인메탈의 전차포를 쓴다. 포뿐만 아니라 전차·장갑차·전투기 동체 등도 만들며, 독일군 주력 전차인 레오파르트도 라인메탈이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