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월가에서 “‘트럼프 풋(Trump Put)’이 실종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 풋이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나 그가 내놓는 정책이 주식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주가 하락을 막아낼 것이란 기대나 믿음을 의미한다. 투자자가 풋 옵션으로 자산 가격 하락 위험을 피하는 것처럼, 트럼프의 발언이 증시를 떠받치는 상황을 가리켜 ‘트럼프’와 ‘풋’을 합친 ‘트럼프 풋’이라 표현했다.
글로벌 금융사 UBS는 최근 고객에게 보낸 서한에 “시장은 트럼프가 주식 시장이 불안정해지거나 경제 성장이 둔화할 때 정책을 바꿀 것이란 기대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고 적었다. 트럼프가 주가 폭락을 보고 관세 정책 등의 ‘속도 조절’에 나설 줄 알았는데, 주식 시장엔 도통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관세 정책을 통한 미국 제조업의 부활이나, 재정 지출 절감 등에 집중하면서 미국 증시는 뒷전으로 밀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기 때와 반대로 가는 증시
트럼프 풋에 대한 기대감이 차갑게 식으면서 미국 증시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와 같은 ‘허니문 랠리(대통령 취임 초 주가 상승)’가 아닌 정반대의 하락장을 경험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2017~2021년) 땐 주식이 꾸준히 상승했지만, 이번(2기 행정부)엔 그 흐름이 완전히 반대<그래픽>가 됐다”고 했다. 미국 증시 대표 지수인 S&P500 지수는 트럼프가 2017년 1월 첫 임기를 시작한 이후 약 1년 동안 24.1% 오른 반면, 2기 행정부가 시작한 이후엔 지난 14일까지 6% 폭락했다.
정치인은 증시에 소홀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특히 미국에선 가계 금융 자산 중 주식 비율이 지난해 4분기 기준 43.5%(연방준비제도 통계)에 달해 증시가 얼어붙으면 민심도 함께 싸늘해진다. 이에 트럼프도 첫 임기 중에는 주식 시장을 살뜰히 챙겼다. 그는 2020년 10월 언론에 “주식 시장을 좋아하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증시 상황은) 역대 최고의 선행 지표”라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주식 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소방수처럼 진화에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이제 투자자들은 연준 풋(연준의 완화적 통화정책에 따른 주가 상승)은 잊고 트럼프 풋에 주의를 기울일 때”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그런데 2기 행정부가 시작한 이후 트럼프의 주식 시장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그는 지난 6일 아예 “난 (주식) 시장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잇따른 관세 위협 정책으로 주식시장이 출렁이자 나온 말이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도 7일 CNBC에 출연해 트럼프 풋과 관련, “풋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달라진 우선순위
그렇다면 트럼프는 왜 시장 상황을 방관하는 듯한 모습일까. 백악관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힌트가 있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10~11일 미 주식시장 하락과 관련) 주식시장에서 보인 어제와 오늘의 수치는 그저 찰나의 순간(a snapshot of a moment of time)”이라며 “우리는 경제적 전환기에 있다”고 했다. 베선트는 CNBC에 “시장과 경제는 정부 지출에 중독됐다”며 “디톡스(해독)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관세 정책으로 자국 제조업을 되살리고, 정부 지출을 감축해 미국 경제의 큰 틀을 바꾸려면 증시 하락과 같은 고통은 일부 감내해야 한다는 취지다.
미국 정부의 천문학적인 빚(국채) 때문에 트럼프가 주식 시장 상황보다는 채권 금리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금리가 내려가야 신규 국채를 발행해 기존 채무를 차환할 때 이자 부담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은 채권 금리부터 떨어뜨려야 주식 시장 등을 챙길 여력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더는 재선의 기회가 없는 트럼프가 경제 정책에서도 ‘마이웨이’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배리 아이컨그린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는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에 더는 출마할 수 없기에 본인의 정책이 자신이 한때 좋아하던 시장 지표(주가 지수)에 어떤 영향을 줄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며 “트럼프 2기 행보를 보면 시장의 평가와 관련 없이 ‘내가 원하는 건 다 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제는 ‘시 풋’이 뜬다
이처럼 ‘트럼프 풋’이 실종된 데 반해 올 들어선 “‘시[習] 풋’의 시대가 왔다”는 투자 업계 분석이 나온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성(姓)에 ‘풋’을 붙인 신조어다. 중국 정부가 “올해도 5% 안팎의 성장률을 달성하겠다”고 천명하자, 중국 증시 전문가들이 이 말을 쓰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적극적인 부양책과 기업 친화적 정책을 쏟아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반영한 단어다. 최근 중국 정부는 최대 연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통해 첨단 산업 육성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시 풋은 실제로 주식시장에 호재로 작용 중이다.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 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20% 추가 관세 부과 조치를 내렸지만, 중국 증시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트럼프 취임 이후부터 지난 14일까지 5.5% 상승했다. 같은 기간 홍콩 항셍지수는 22.3% 상승했다. 블룸버그는 “시 풋이란 용어가 등장한 건 최근 몇 년 동안 해외 투자자들의 투자를 꺼리게 만들었던 중국 지도자(시진핑)에 대한 시선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며 “정반대로 트럼프 풋에 대한 믿음은 매우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