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인 이란 이스파한. 지난달 29일 이 지역 농업 생명선이던 양수장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다른 지역으로 물을 보내는 수도관이 박살 났고, 이스파한에서 300㎞ 남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야즈드 지방으로 가야 하는 물은 갈 길을 잃게 됐다. 50만명에 이르는 인구가 먹고 쓸 물이 딱 끊겼다.
양수장 테러를 자행한 이들은 이란과 적대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도, 미국도 아니었다. 이날 아침부터 밀려든 이스파한 주민들이었다. 이 지역 농부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이스파한에 있는) 루드강에 방류해야 할 물을 야즈드로 끌어가고 있다”며 공격을 감행했다. 이란인터내셔널 등 현지 매체는 이란 전역을 강타한 물 부족 문제를 다루며 “이란이 전례 없는 물 부족으로 말라가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야 수도꼭지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집이 태반이지만 세계적으로 타는 듯한 목마름을 호소하는 곳이 갈수록 늘고 있다. 세계자원연구소(WRI)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4분의 1이 사는 25국은 극심한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다. 세계 인구의 절반쯤인 약 40억명은 1년에 한 달은 물 부족을 경험한다.
물 부족은 단순히 식수 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작물 재배나 가축 사육, 전기 생산, 제조업 등에 필수적인 물이 부족해지자 각종 산업에서 부작용이 속출한다. WEEKLY BIZ는 세계가 메말라가는 까닭은 뭔지, 그 여파는 어떤지 깊이 있게 들여다봤다.
◇물 한 컵 마셔야 질문 6가지 답하는 챗GPT
물 부족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물 부족으로 인한 타격도 큰 대표적 분야는 인공지능(AI) 산업이다. AI의 필수 요소인 데이터센터에 막대한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는 AI 기술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대규모 데이터를 저장·처리·관리하는 곳이다. 전력 소모가 많은 서버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고 원활하게 작동하게 하려면 많은 양의 냉각수와 발전수가 필요하다. 특히 냉각수는 서버를 한번 식히고 나면 80%가량이 증발하는 데다, 남은 물도 몇 번 사용하면 오염도가 심해 쓸 수 없어서 지속적인 깨끗한 물 공급이 필수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이터센터를 본격적으로 늘리기 시작한 2022년에 전년보다 물 사용량이 34% 늘었는데, 총사용량이 17억갤런에 달했다. 17억갤런은 올림픽 규격 수영장 2500곳 이상을 채울 수 있는 양이다. 구글은 이보다 많은 56억갤런을 사용했다. 전년보다 22% 늘었다.
생성형 AI 챗봇에 질문을 하나 할 때 얼마나 물이 많이 필요한지 계량적으로 따진 연구도 주목받고 있다. UC리버사이드 전기컴퓨터공학부 샤오레이 렌 교수의 ‘AI 모델의 비밀스러운 물 발자국 발견 및 해결’ 논문에 따르면, 챗GPT가 질문 하나에 답할 때마다 필요한 물은 7.6~29.9mL라고 조사됐다. 이는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데 쓰는 전력 발전용 물과 냉각용 물을 합친 것으로, 데이터센터 위치에 따라 필요량의 차이는 있다. 29.9mL가 필요한 지역은 미국 애리조나였는데, 이 지역 서버를 이용한 챗GPT는 물 한 컵(200mL)은 마셔야 질문 6가지에 답할 수 있다고 계산됐다.
데이터센터 인근의 물 부족이 심화하자 데이터센터 기피 현상도 거세진다. 2023년 7월, 74년 만에 최악 가뭄을 겪은 우루과이에서는 구글 데이터센터 건설을 막기 위해 시위까지 벌어졌다. 칠레,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도 데이터센터 건설로 인한 물 부족 우려가 나온다.
◇자동차·반도체도 ‘물 비상’
NH금융연구소가 내놓은 ‘NH농협금융 주간 브리프’ 자료를 보면 물 부족 리스크는 산업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추세다. 특히 물 사용이 많은 반도체·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반도체 공정엔 수자원이 핵심 자원으로 꼽힌다. 제조 공정, 공정 가스 정화, 클린룸의 온습도 조절 등 반도체 한 판을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물이 필요하다. 삼성전자 기흥·화성·평택 사업장에서는 물을 하루 평균 약 30만5000t 쓰고, 대만 TSMC도 공장 하나에서 매일 9만9000t가량 물을 쓴다고 한다. 그런데 2040년쯤엔 반도체 제조 공장의 40%가 극심한 물 부족 지역에 놓일 것이란 전망(세계경제포럼)이 나온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물 부족 대응책 마련이 한창이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지역 자동차 제조사들은 자동차 한 대를 만들 때 쓰는 물의 양을 2005년부터 2022년 사이 34.4% 줄였다. GM(제너럴모터스)은 멕시코 공장에서 물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5700만달러(약 834억원)를 투자했다. NH금융연구소 관계자는 “현대차의 미국 조지아 공장은 하루에 물을 665만갤런 쓰는 조건으로 최종 승인을 받았으며, TSMC가 있는 대만은 5억4500만달러 규모의 담수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등 첨단 제조 업체들이 물 부족으로 인한 비용과 위험에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아디다스나 나이키 등 의류 업체도 물 소요가 많은 목화 대신 다른 소재를 개발하고 올해까지 물 사용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고 전했다.
◇맥도널드가 닭고기를 내세운 까닭도 ‘물’
물 부족은 사람들 입맛도 억지로 바꾸게 한다. 맥도널드가 소고기 패티가 든 버거보다 맥치킨이나 맥크리스피와 같은 닭고기를 활용한 메뉴를 늘리는 것도 결국 물 부족과 연관이 있다는 해석이다. 가뭄 영향으로 사료 공급이 줄자 최근 미국 내 소고기 가격은 2020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이에 맥도널드와 같은 대형 패스트푸드 체인은 원료비를 줄이기 위해 닭고기 메뉴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소고기는 주요 식품 중 물 소비가 가장 많은 품목이다. 소고기 1㎏을 만들기 위해선 물이 1만5500L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료를 키우거나 축사를 청소하는 데 필요한 물을 모두 계산한 양으로, 닭고기(3900L)나 돼지고기(4800L)의 서너 배에 달한다.
물을 직접 쓰는 음료 산업에선 높아지는 물 가격이 더 큰 걸림돌이다. 실제 멕시코에선 맥주 브랜드 코로나와 모델라 등을 생산하는 컨스텔레이션 브랜즈가 6억6000만달러를 들여 거의 완공한 양조장을 물 문제로 포기한 사례까지 생겼다. 회사는 주력 수출 시장인 미국에서 멀어지는 물류 비용에 13억달러 추가 건설 비용까지 들여가면서 물 공급이 더 좋은 지역에 새 공장을 만들었다.
◇‘물 쓰듯 쓴 물’ 탓에… 10경원 손실 예상
이처럼 산업 전방위적으로 물 부족 현상에 처한 건 자업자득 성격이 강하다. 물이 부족해진 근본 원인이 과잉 수요이기 때문이다. 지구상 물 대부분은 바닷물이고,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담수(淡水)는 2.5%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99.23%는 빙하 속에 갇혀 있다. 더구나 담수는 한번 쓴 뒤에 담수 자원으로 되풀이해 쓰려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농업 용수로 쓰인 물은 작물 이파리를 통해, 발전 용수로 쓰인 물은 증기가 돼 공기 중으로 날아간다. 수증기는 비로 변해 내리지만 이마저도 지구 표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다로 떨어진다. 결국 인류는 강·호수·지하수를 통한 담수 공급에 크게 의존해야 한다.
이렇듯 물은 한정된 자원인데, 최근 ‘수요’는 확 늘고 ‘공급’은 줄었다. 우선 수요 측면에선 인구가 늘고 산업이 발달하며 물 소비가 급격히 불고 있다. WRI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물 수요는 1960년 이후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반면 공급은 되레 줄었다. 지구온난화가 주범이다. 지구 온도가 올라가자 이전엔 증발하지 않았을 물까지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린다.
이에 물 부족 아마겟돈은 차츰 현실화하고 있다. WRI는 2100년까지 지구 기온이 섭씨 2.4도 오른다는 보수적인 예측을 기반으로 전망해도 2050년까지 새로 약 10억명이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릴 것으로 내다본다. 2050년까지 물 부족으로 인한 경제 손실 역시 국내총생산 기준 70조달러(약 10경3000조원)로 예상된다.
◇물 부족이 ‘제2의 아랍의 봄’ 불러올까
물 부족 현상이 치명적인 건 기후·지형에 따라 원래 물이 부족한 국가에서 수자원이 더 부족해지는 ‘물 빈익빈’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물 부족이 가장 심각한 지역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인구의 83%가 극심한 물 부족을 겪고 있다. 남아시아 역시 74%가 물 부족에 시달리는 형편이다.
향후 지역별 물 부족 상황을 예측해 보면 개발도상국일수록 더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각종 기반 시설을 짓는 등 개발 수요가 많은 나라일수록 지금보다 많은 물이 필요하다. WRI는 “2050년까지 물 수요의 가장 큰 변화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일어날 것”이라며 “이 지역 국가 대부분은 물 수요가 세계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50년까지 해당 지역의 물 수요가 2019년 대비 163%나 증가할 수 있다는 예상이다. 이런 증가 폭은 물 수요 증가율이 둘째로 높을 것(43%)으로 예상되는 남미의 네 배에 달하는 수치다.
이렇게 물 부족이 심한 나라에선 향후 정치적 불안까지 야기될 수 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알제리의 평화와 민주를 위한 비정부기구인 ASC 창설자 함자 하무셴을 인용해 “물 부족 등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이슬람국가(IS) 같은 테러 조직이 더욱 발호할 위험이 있다”며 “또 (정치적 불안 여파로) 2011년 중동을 휩쓴 ‘아랍의 봄’이 기후변화를 틈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