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일본의 103대 총리다. 지금까지 일본 총리직에 오른 65명 가운데 4대와 6대 총리를 맡은 이가 마쓰카타 마사요시인데, 그의 셋째 아들인 마쓰카타 고지로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아버지의 비서관 등을 지낸 뒤 1896년 고베의 가와사키 조선소 초대 사장을 맡았다. 아버지와 동향인 가와사키 조선소의 창업자에게서 미국 유학 자금을 지원받은 인연도 작용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등으로 선박 수요는 차고도 넘쳤다.
1914년엔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마쓰카타는 1916년 사업을 확장하러 런던으로 갔다. 그는 그 무렵 서양화의 매력에 푹 빠졌고, 불과 10년 만에 일본인으로선 가장 많은 서양 작품을 보유한 컬렉터로 거듭났다. 3000점이 넘는 서양 미술 작품을 사 모은 그는 미술관을 짓고 싶었다. 미술관의 명칭은 ‘교라쿠(共樂) 미술관’. 서양의 미술 작품을 일본에 소개해 모두 즐겁고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담겼다. 그의 열정은 파리에서 클로드 모네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인상파의 거장인 당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는 진정 어린 설득에 모네는 그림 30점을 그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미술관 설립이란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1927년 일본에 닥친 경제 공황으로 회사가 휘청거렸다. 마쓰카타는 회사 재건을 위해 그의 재산을 내어놓아야 했다. 그가 일본에 가져왔던 미술품은 경매에 부쳐져 모두 흩어졌다. 심지어 런던의 창고에 보관돼 있던 1000여 점의 작품은 1939년에 일어난 창고 화재로 전부 소실됐다. 그나마 파리에 남겨진 작품들은 프랑스 정부가 적대국의 자산으로 취급해 압수했던 탓에 잘 간수됐다. 마쓰카타는 1950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꿈도 함께 사라지는 듯싶었다.
1951년 9월, 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48국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체결 직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마쓰카타 컬렉션의 반환을 요청했다. ‘일본이 보유한 현지 자산은 모두 현지국이 보유하되, 개인 자산은 예외’란 조항에 근거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그렇다면 마쓰카타가 수집한 작품을 제대로 전시할 장소를 마련해라. 단, 건축가는 프랑스인이어야 한다”를 협상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런 연유로 르코르뷔지에가 건축가로 선정됐고, 그가 설계한 건물은 ‘국립서양미술관’이란 이름으로 1959년에 문을 열었다. 프랑스는 ‘반환’이 아닌 ‘기증’이란 형식으로 대부분의 작품을 돌려줬다.
공교롭게도 유네스코는 2016년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 17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현대 건축 운동에 뛰어난 기여를 했다는 이유였다. 그 덕에 일본은 세계문화유산 현대 건축물을 보유한 국가가 됐다.
2019년에는 국립서양미술관 개관 60주년 기념전이 열렸다. 먼저 눈길을 끈 작품은 모네의 ‘수련, 버드나무의 반영’이었다. 가로 2m, 세로 4.2m에 달하는 이 작품은 모네가 1916년에 그린 습작화였다. 그린 지 100년이 지나 루브르 박물관에서 발견됐고, 이후 마쓰카타의 소유로 확인됐다. 또 하나 눈길을 끈 작품은 프랑스가 일본에 돌려주지 않은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1889)이었다. 실은 이 작품도 마쓰카타가 소유했던 작품이었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을 프랑스 내 영구 전시로 돌렸다.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한 개인의 꿈이 국가의 지원으로 사후에 실현됐다. 그가 초대 사장으로 있었던 가와사키 조선소(현 가와사키 중공업)는 2023년 4월부터 공식 후원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 강국이 되는 데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발 벗고 나서고, 기업이 성심성의껏 지원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국립서양미술관의 마쓰카타 컬렉션이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