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월급만 받으면 마트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가가 폭등하니) 생필품 사재기하려 말이죠. 그런데 요즘 그런 모습이 싹 자취를 감췄어요.”
지난 20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바시토의 한 대형 마트. 바쁘게 물건을 정리하던 마트 직원 안드레아가 이같이 말했다. 실제로 이날 계산대 앞에 줄 선 손님들 카트엔 물건이 절반도 안 든 경우가 많았고, 빵이나 치약 같은 꼭 필요한 물건 몇 개만 달랑 든 손님도 상당수였다. 손님 구스타보(42)씨는 “자고 일어날 때마다 물건 값이 치솟아 가격표 바뀌는 일이 사라지니 계산대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도 절반 이상 줄었다”고 했다.
지난 23일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집권한 지 딱 500일을 맞았다. 전동 톱을 든 남미의 급진적 광인(狂人) 이미지를 풍겼던 그는 2023년 12월 11일 취임 연설에서 “폐허처럼 변한 사랑하는 조국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500일 만에 그 폐허가 회생하고 있다. 최악 경제난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던 마트 풍경부터 달라졌다. 밀레이 집권 직전인 2023년 12월 25.5%까지 치솟았던 물가 상승률이 최근 2~3%대까지 떨어진 덕분이다.
밀레이는 대선 유세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전동 톱을 들고 포퓰리즘을 단번에 잘라내 경제를 회복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집권하자마자 ‘전동 톱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긴축 정책, 정부 규모 축소, 가격 통제 해제 등 규제 완화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충격 요법이 이어졌다. 그 결과 악명 높던 격동의 경제가 안정되고 있다. 이달 초 국제통화기금(IMF)은 밀레이의 강력한 긴축 프로그램과 무적자 재정 정책을 두고 “인상적인 초기 성과”라 평했다. WEEKLY BIZ는 집권 500일을 맞은 밀레이의 전동 톱 개혁을 분석했다.
◇톱질① : 아르헨의 공공 부문 톱질
“노동자 단결! 싫으면 꺼져라, 꺼져라!” 지난해 4월 초 아르헨티나의 정부 부처 앞에선 공무원 노조의 소집에 호응한 성난 시위대가 북을 두드리며 거센 항의를 이어갔다. 밀레이 정부가 공무원 약 1만5000명을 잘라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공무원들이 거리에 나선 것이다.
포퓰리즘에 빠진 나라들이 흔히 그러하듯 아르헨티나도 전체 근로자 4분의 1에 육박하는 340만여 명이 공공 부문 근로자일 정도로 ‘공무원 천지’였다. 앞선 페로니즘(1940~1950년대 좌파 지도자 후안 페론을 계승하는 대중 영합주의) 정권들이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공공 부문 덩치를 키워왔기 때문이다. 이에 눈덩이처럼 비대해진 정부가 막대한 재정 지출을 유발하는 상황이 고착됐다. 아르헨티나 공공 고용 통합 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중앙정부 공무원만 해도 2010년 32만7292명에서 2023년 49만5580명으로 13년 만에 50%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밀레이는 과감한 톱질을 했다. 밀레이는 취임 첫 주부터 중앙 부처를 18곳에서 9곳으로 반 토막 냈다. 공무원들의 거센 항의에도 개혁은 이어졌다. 밀레이는 취임 직후 대통령령 등을 통해 단순 사무 계약 직원과 업무가 중복돼 업무 효율이 낮은 공무원들을 해고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밀레이 취임 후 지난 2월까지 15개월 동안 중앙정부 전체 공무원의 8.4%에 해당하는 4만2034명을 해고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공공 부문 다이어트를 두고 페데리코 스투르세네게르 규제개혁부 장관은 이렇게 선언했다. “국민 모두의 세금이 줄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인건비와 고용 유지에 드는 각종 비용을 합해 연간 약 16억3500만달러(약 2조3370억원) 재정 절감 효과를 낸 것으로 추산됐다. 최근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부효율부(DOGE) 수장 일론 머스크가 하고 있는 공공 분야 개혁 조치의 원조가 사실 아르헨티나였던 셈이다.
◇톱질② : 보조금·연금도 톱질
밀레이는 국민 부담이 커져 자칫 정권의 인기를 뚝 떨어뜨릴 수 있는 개혁도 과감하게 밀고 갔다. 아르헨티나 국민의 지지 덕분이었다. “우리는 ‘미친 사람’이 아르헨티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어요.” 수퍼마켓 종업원 에미르 굴로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결코 해결하지 않는 낡은 정치인들에게 지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소 힘들어도 밀레이의 개혁으로 아르헨티나의 환골탈태를 기대했던 셈이다.
물론 국민 부담은 적잖았다. 밀레이 정부는 대중교통 요금에 대한 정부 보조금부터 깎아냈다. 밀레이는 보조금 삭감으로 부족해진 수송 원가를 충당하기 위해 지난해 5월 지하철 기본 요금을 단번에 125페소(약 150원)에서 574페소로 인상한 뒤, 이번 달까지 869페소로 올렸다. 같은 기간 시내버스 기본 요금도 53페소에서 426페소로 인상했다. 1년 여간 대중교통 요금을 7~8배 올린 셈이다.
전기, 가스 등 각종 에너지 요금에 들어가는 보조금도 대폭 줄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정치경제학학제연구소(IIEP)에 따르면, 중산층 가정이 2023년 12월에는 전기·가스·수도 요금 등에 월간 약 30달러를 지출했는데, 지난해 9월에는 142달러로 5배가량 늘었다. 원자재 수출 사업을 하는 파블로(52)씨는 “2년 전엔 전기·가스 요금으로 월 50달러쯤 지출했는데, 요샌 요금 폭탄을 맞는 게 두려워 냉난방을 하루 2시간씩 덜 가동하는데도 월 130달러 정도가 나온다”고 했다.
밀레이는 정부 지출의 25%가량을 차지하던 퇴직연금에도 손을 댔다. 원칙적으로 정규 퇴직연금을 수령하려면 30년 동안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야 한다. 하지만 전임 정부에선 30년을 채우지 않고 은퇴한 이들이 잔여 기간만큼의 보험료를 장기간에 걸쳐 나눠 낼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특례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특례 혜택을 받은 이들이 내야 할 보험료는 그간의 급격한 물가 상승이 반영되지 않은 과거 소득 기준으로 따져 터무니없이 낮게 잡히는 반면, 실제 수령하는 연금액은 인플레이션이 반영된 현재 기준으로 부풀려져 형평성과 지속성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과거 간호사로 일하며 연금보험을 15년간 납부한 마르타(63)씨는 “나는 매월 300달러 정도의 연금을 받으면서, 추가로 6달러 정도의 보험료만 지불했다”고 했다.
밀레이는 이에 “연금을 정직하게 내야 한다”며 개선 작업에 나섰다. 물가 상승이 가파른 아르헨티나에선 수령하는 연금 액수를 매달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 조정해 주는 관행이 있었지만 더 적게 올리는 식으로 실질 수령액을 줄였다. 특례 제도는 아예 없애버렸다. 민간 싱크탱크인 아르헨 정치경제연구소(CEPA)는 “지난해 전년 대비 삭감된 정부의 재정 지출 가운데 보조금과 연금 삭감을 통해 줄어든 비율이 약 33%를 차지한다”고 분석했다.
◇개혁 부작용이라던 ‘빈곤율’까지 낮아져
아르헨티나에선 충격 요법과 급격한 변화로 인해 부작용이 적잖았던 게 사실이다. 정부가 지출 감소를 위해 지방의 대규모 공공 기반 시설 사업을 중단하자, 건설업 등에서 일자리가 급감했다. 2023년 4분기 5.7%이던 실업률은 다음 분기에 7.7%까지 뛰었다. 은퇴자들의 연금 수령액이 줄고 에너지 요금과 교통비가 증가하며 소비자들의 구매력도 줄었다. 밀레이는 또 페소화를 단번에 54% 평가절하했다. 공식 환율은 두 배 이상 올랐고, 인플레이션 불길을 자극했다. 아르헨티나 통계청에 따르면, 한 달 새 의약품 가격이 40%가량 급등하는 등 밀레이 취임 석 달 동안 월간 물가 상승률은 평균 15%에 이르렀다.
아르헨티나에선 구매력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물가까지 오르자 빈곤율이 치솟았다. 전임 정부 막판 41.7%였던 빈곤율은 밀레이 집권 후 6개월 만에 52.9%까지 올랐다. 빈곤율을 결정하는 빈곤선은 의식주와 교통, 보건 등을 포함한 필수적 한 달 생활비로, 지난해 말 4인 가족 기준 약 500달러(약 70만원) 수준이었다. 파히나12 등 현지 매체에선 “밀레이의 급진적인 정책이 정책 실패와 부작용을 키웠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밀레이는 뚝심 있게 ‘톱질’을 계속했다. 취임 이후 지난해 12월을 제외한 매달 재정 흑자를 냈다. 그러면서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 재정 적자를 메우는 ‘언 발에 오줌 누기’ 방식의 관행을 지속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시장에 반복적으로 보냈다. 밀레이는 “우리는 페소를 인쇄하는 이전 정부의 낡은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지난해 5월부터 아르헨티나의 월간 물가 상승률은 5% 아래로 떨어져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빈곤율은 38.1%까지 떨어져 2022년 수준으로 내려갔고, 실업률도 고점 대비 1.3%포인트 낮아지는 등 충격 요법으로 인한 부작용도 치유되는 상황이다.
◇무역·외환 규제 개혁에도 전동 톱 통할까
올 들어 아르헨티나 마트의 식자재 코너에선 우루과이산 버터, 알바니아산 파스타면, 브라질산 식빵 등 아르헨티나산 제품보다 저렴한 수입 상품들이 진열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 마트에선 수입 식품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전임 정부는 생필품 2000여 종에 ‘공정 가격(precio justos)’이란 이름을 붙여 가격을 통제했고 품목별로 수입 관세를 수십% 매겨 국산품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식으로 수입품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밀레이는 가격 통제를 해제하고 지난해 하반기부터 식자재 등에 대한 수입 규제를 푸는 것을 시작으로 무역 장벽을 낮췄다. 이에 다양한 나라에서 들여온 수입품이 마트에 등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난 14일 밀레이는 부분적인 외환시장 자유화 조치를 단행하며 경제 개혁의 두 번째 막을 올렸다. 조치를 앞둔 지난 11일 방송에 출연한 밀레이는 “세계는 곧 중국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아르헨티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정부는 중앙은행이 정하는 환율로 외화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고정환율제를 폐지하고, 1달러당 1000~1400페소 사이에서 환율이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하는 변동환율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종전에 월 200달러 내에서만 가능하던 개인의 달러 환전을 지난 14일부터 무제한으로 허용했다.
그간 아르헨티나는 좌파 정부 아래서 외환과 자본 이동을 강력히 통제하기도 했다. 이는 특히 다국적 기업이 아르헨티나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밀레이는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소해 다국적 기업과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고, 산업 기반을 확충하겠다는 구상이다.
◇“빌어먹을 자유 만세”
트럼프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구호가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면, 밀레이가 연설 때마다 외치는 구호는 ‘빌어먹을 자유 만세!(¡Viva la libertad, carajo!)’다. 국가의 간섭과 규제를 줄이고 자유주의를 열망한다는 뜻을 거칠게 내뱉는 셈이다.
밀레이가 500일 동안 이 구호를 외치며 실제 아르헨티나를 옭매던 규제를 풀자 해외에서도 아르헨티나를 보는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IMF는 이달 아르헨티나에 200억달러의 신규 대출을 승인했다. 아르헨티나는 또 최근 중국과 50억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교환)를 연장하며 자국 외환시장에 긍정적 신호를 줬다. 맬컴 도슨 글로벌X 신흥시장ETF 전략 책임자는 FT에 “(외환 규제 완화 조치로) 기업들이 아르헨티나에 다시 투자할 길이 열려 밀레이의 계획이 지속 가능해질 것”이라 전망했다.
6개월 앞으로 다가온 10월 총선은 밀레이의 전동 톱 정책이 추진력을 얻을지 좌우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현재 밀레이가 속한 여당 ‘자유의 전진’은 하원 257석 중 38석, 상원 72석 중 6석에 불과하다. 밀레이가 50% 안팎 지지율을 유지하는 가운데, 좌파 페로니스트당은 내부 분열 중인 상황이다.
다만 밀레이의 과격한 언행은 ‘아킬레스건’으로 꼽힌다. 그는 지난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기후변화, 사회복지, 성적 다양성 등에 대해 “인류를 쓰레기로 만드는 이데올로기” “정신적 바이러스” 등으로 표현했다. 지난 3월 반정부 시위대에 대해선 “개자식들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다. 이런 언행이 지지율을 깎아먹는다고 스페인어권 매체 엘파이스는 분석했다. 칼럼니스트 우코 알코나다 몬은 “밀레이가 10월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스스로 발에 총을 쏘는 짓을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