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6일 워싱턴 DC에 도착해 2박 3일 방미 일정에 들어갔다. 이시바는 트럼프가 지난 4일 정상회담을 가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이어 두 번째 정상회담 상대로 선택한 외국 지도자다. G7(주요 7국)과 아시아·태평양 국가 중 가장 먼저 트럼프와 대면하게 됐다. 두 정상은 이번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외교·안보·경제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을 모색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 여파로 한국의 정상 외교가 올스톱된 상황에서 일본이 트럼프 2기 정상 외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지자 모임에 참석해서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앞으로 뻗는 특유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 사진) 트럼프는 취임 뒤 두 번째 정상회담 상대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선택했다. 정상회담 전날인 6일 이시바(줄무늬 넥타이 맨 남성) 총리가 미국 메릴랜드주(州)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한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6일 오후 전용기편으로 워싱턴DC에 도착한 이시바는 밤 늦게까지 측근들과 정상회담 준비에 몰두했다. 이번 정상 외교를 통해 미국과 일본은 군사 협력을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할 전망이다.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협력 심화 방안도 모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방위비 인상, 무역 불균형 해소 문제, 그리고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이 무산시킨 일본제철의 미국 철강 회사 US 스틸 인수의 재추진 등 껄끄러운 문제들까지 논의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7일 “정상회담 공동성명 내용에 두 나라의 황금기를 만든다는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황금기’는 트럼프가 지난달 20일 취임사에서 꺼냈던 말이다. 트럼프는 “미국은 지구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존경받는 국가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황금기가 시작된다”고 했었다. 이시바는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던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트럼프 1기(2017년 1월~2021년 1월) 시절 구축했던 밀월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미 대선이 끝난 뒤부터 트럼프와의 빠른 만남을 타진해왔다.

그래픽=이철원

◇G7 중 트럼프 가장 먼저 만난 이시바, ‘AI·에너지·안보’ 선물

일본 정부는 대선에서 트럼프가 압승하며 재집권을 확정짓자 일찌감치 조기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아베 전 총리의 배우자 아베 아키에 여사가 지난해 12월 플로리다주의 트럼프 자택으로 급파돼 트럼프 부부와 만찬을 가지며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같은 달 손정의(일본명 손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도 트럼프와 만난 자리에서 1000억달러(약 144조원)의 미국 투자를 약속했다. 범국가적으로 진행된 외교전 끝에 성사된 트럼프와의 양자 회담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이시바는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최근 일주일 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발언을 체크한 뒤 시나리오를 짜고 예상 답변을 암기했다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 통역자에 과거 아베 총리의 영어 통역을 했던 외무성의 다카오 나오루 일미지위협정실장을 앉혔다. 외무성 고위 관료가 총리 통역을 맡는 것은 이례적이다.

일본은 이번 정상 외교를 통해 우선 중국과 북한의 군사 위협에 맞서 미국과의 철통 군사동맹을 재확인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일본에서는 강대국 정상들과의 톱다운식 소통을 선호하는 트럼프 특유의 스타일을 우려하며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미국이 동맹보다는 국익을 우선해 북한 핵과 중국·러시아의 군사 위협에 노출된 한국과 일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트럼프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민감한 안보 현안을 담판 짓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가 최근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부른 건, 북한 비핵화에 대해 도쿄와 서울 모두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했다. 이시바는 트럼프에게 일본과 북한의 오랜 현안인 납북 피해자 송환 문제와 관한 협조도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고 교도통신은 보도했다.

안보 분야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시바가 두둑한 선물 보따리를 준비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앞서 트럼프는 지난달 손정의와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 래리 엘리슨 오러클 회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인공지능(AI) 합작회사 ‘스타게이트’ 출범을 발표했다. 이시바는 이와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의 AI 정책에 대한 적극적 동참과 지원 방침을 약속하고, ‘추가 선물’로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량 확대를 약속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화석연료의 적극적인 생산과 관련 산업 부활을 핵심 에너지 정책으로 제시해온 트럼프는 지난달 20일 조 바이든 전 행정부가 동결해온 LNG 신규 수출을 허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세계 주요 LNG 수입국 중 하나인 일본이 여기에 선제적으로 호응해 현재 10% 미만인 미국산 수입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것이다. 이시바는 트럼프가 추진하는 약 1287㎞ 규모의 알래스카의 가스 파이프라인 개발 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이번 정상 외교를 통해 트럼프는 미국과 일본 간 무역 적자 불균형의 해소와, 일본의 방위비 인상 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며 최대한 협조를 얻어내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미 상무부가 지난 5일 발표한 2024년 미국의 무역 수지 현황에 따르면 미국의 대일본 무역 적자는 685억달러(약 99조원)로 중국·유럽연합·멕시코 등에 이어 여덟째로 많았다. 트럼프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에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방위비 인상을 역시 핵심 동맹인 일본에 요구할 가능성도 높다. 트럼프는 나토 회원국들의 방위비 지출 목표를 현행 국내총생산(GDP) 대비 2%에서 5%로 대폭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일본은 2022년 당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향후 5년간 순차적으로 방위비를 GDP 대비 2% 수준까지 증강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해마다 방위비를 큰 폭으로 증액해왔다. 올해 방위비는 역대 최대 규모인 8조6691억엔(약 82조5800억원)으로 GDP의 1.6% 수준이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나토 동맹국에 대한 요구안만큼은 아니어도 최소 3% 수준까지 올릴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관측이 일본과 미국 정치권에서 나온다. 주일 미국 대사를 지낸 빌 해거티 공화당 상원 의원은 6일 미 워싱턴 싱크탱크인 허드슨 연구소 대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시바 총리에게 GDP 대비 3% 이상까지 끌어올릴 것을 요구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 미국과 일본이 이례적으로 동맹 간 낯을 붉혔던 일본제철의 미국 철강 회사 US스틸 인수를 재성사시키는 문제도 의제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퇴임 직전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이를 불허해 일본 정부의 반발을 샀고, 두 회사는 미국 법원에 행정소송을 낸 상태다. 이시바는 4월 개막하는 오사카 세계박람회(엑스포)를 계기로 트럼프를 일본으로 초청할 계획이다.

이시바는 이번 미국 방문을 통해 불안정한 당내 입지를 다지며 장기 집권 토대를 쌓으려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트럼프의 협상술에 말려들 경우 예기치 못한 외교적 부담을 짊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예측할 수 없는 트럼프의 백악관에서는 간단한 만남조차도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며 “이번 정상회담은 트럼프가 일본을 아시아·태평양에서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로 보는지, 협상 테이블 너머에 있는 파트너로 볼 뿐인지 진실의 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회담에선 (예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논의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과의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가자지구 점령 같은 깜짝 제안을 내놓은 것은 일본 정부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