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5일 미국 오하이오주의 소도시 먼로에 있는 작은 교회. 슬하 5남매와 손주 열 한 명, 증손·고손주 여섯명을 남기고 떠난 뷸라 밀번 할머니의 영결식이 열렸다. 고인과의 작별의 시간이지만 영결식장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밝았다. 고인이 104세까지 장수한 호상(好喪)이기도 하지만, 밀번 집안의 새로운 가보(家寶)가 이날 선보였기 때문이다. 식장 입구에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동전 다섯개가 담긴 상자, 그리고 그 중 한 동전을 확대해 인쇄한 그림이 놓였다.
이 동전은 올해 시중에 풀릴 25센트(쿼터) 동전. 앞면에는 미국의 건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뒷면에는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성이 커다란 뒷바퀴와 작은 앞바퀴가 달린 전동휠체어에 앉아 웃는 모습이 새겨졌다. 고인의 손녀이면서 한국계 최초로 미국 화폐 도안 인물이 된 장애인 인권운동가 스테이시 박 밀번(1987~2020·한국이름 박지혜)이다. 밀번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마침내 실물로 등장했다. 2023년 10월 연방 조폐국이 미국사회에 공헌한 여성들의 얼굴을 쿼터의 고정인물인 조지 워싱턴과 함께 앞뒷면에 새겨서 기리는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에 밀번을 포함시킨다고 발표한지 1년 5개월만이다.
쿼터는 주차장·마트 등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동전이다. 2022년 시작돼 올해까지 매년 다섯명씩 진행되는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에는 퍼스트레이디·작가·우주비행사·팝스타 등 쟁쟁한 여성들이 포함됐다. 서른 셋 짧을 삶을 살다 코로나 시기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세계는커녕 미국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밀번을 이 프로그램에 포함시키고 싶다는 연락을 2022년 조폐국으로부터 받고 어안이 벙벙했던 부모는, 생전 모습 그대로 전동 휠체어에 당찬 표정을 앉은 딸아이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받아봤다. 밀번의 얼굴이 새겨진 쿼터 동전은 오는 8월부터 시중에 유통된다.
그에 앞서 한정수량으로 발행되는 기념품 세트(Proof Set)가 먼저 선보였다. 밀번과 함께 올해 발행되는 쿼터 동전에 얼굴이 새겨지는 여성 언론인이자 인권운동가인 이다 웰스(1862~1931), 걸스카우트 창립자 줄리엣 고든 로(1860~1927), 천문학자 베라 루빈(1928~2016), 흑인 여성 테니스 스타 앨시어 깁슨(1927~2003)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다섯점의 실물이 특수표면처리 돼 케이스안에 담겨있고, 이 동전이 진품임을 알려주는 연방 조폐국 증명서가 첨부돼있다. 밀번의 어머니 진 밀번씨는 영결식을 찾은 손님들과 동전을 보며 환담했다.
진씨는 “하늘나라에 벌써 가있는 아이가 할머니를 마중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넉 달쯤 뒤인 8월에는 워싱턴DC 국립여성사박물관에서 연방 조폐국이 주최하는 공식 행사와 함께 앞면에는 조지 워싱턴, 뒷면에는 밀번의 얼굴이 새겨진 쿼터 동전이 최대 7억개 발행된다. 밀번은 주한미군 헬기 조종사였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근육 퇴행성 질환을 앓았다. 부모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주한 뒤 초등학교 4학년 때 낙상 사고를 겪은 것을 계기로 자신의 근육이나 체력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점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장애를 안고 살아가면서 사회 곳곳에서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그리고 사회가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등 생각을 담은 진솔한 블로그 글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청소년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던 2007년 노스캐롤라이나의 공립 고교 교육과정에 장애인 역사를 포함시키는 사안을 공론화하고 관철시켰다. 젊은 인권운동가로 주목받으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선 당시 장애인을 위한 대통령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돼 활동했다.
노스캐롤라이나 메소디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는 장애인 인권 단체인 ‘장애인의 정의(Disability Justice)’를 창설하여 권리 증진 운동에 뛰어들었다. 2019년에는 캘리포니아 지역 전력 회사가 산불 대비 훈련 일환으로 일부 지역에 예고없이 전기를 끊어 산소호흡기 등에 연명하는 중증 장애인 등 취약계층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이슈를 점화하는데 선봉에 섰다. 2020년 1월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그는 장애인과 저소득층,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마스크와 긴급 의약품·위생용품을 전달하는 긴급대응 팀을 구성해 활동했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면서 서른세살 생일이던 그해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불편한 몸으로 전동 휠체어에 의지해 이동했던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면서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했던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다. 평소 “나는 스테이시 밀번이 아니라 스테이시 박 밀번”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 핏줄을 자랑스러워했던 그는 엄마의 나라 한국 여행을 더없이 좋아했다. 한국의 장애인 인권단체들과 만났었고, 앞으로도 계속 협력하며 한·미 우호의 범위를 넓히는 청사진까지 계획했다.
‘미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 기억되길 원했던 딸의 뜻을 이어받아 가족들은 동전 발행과 함께 출시되는 각종 기념품들에 최대한 한국 색채를 입힐 계획이다. 특히 밀번이 생전에 정말로 좋아했던 한국의 상징 동물 호랑이의 디자인도 들어갈 전망이다. 밀번을 비롯해 올해 여성 네 명의 동전 발행을 끝으로 4년 동안 진행되어온 ‘아메리칸 위민 쿼터스 프로그램’은 막을 내린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인이자 소설가 마야 안젤루, 여성 최초 우주비행사 샐리 라이드, 할리우드 첫 중국계 배우 안나 메이 웡, 첫 흑인 여성 비행사 베시 콜먼, 쿠바 출신 라틴 팝스타 셀리아 크루즈 등이 쿼터 동전으로 부활해 미국인들과 만났다.
밀번은 이 중에서 세상에 가장 짧게 머물렀고, 가장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 여성 참정권을 보장한 미국 수정헌법 19조 100주년을 기념해 진행된 이번 프로그램은 올해를 끝으로 4년 여정을 마무리한다. 동양계·장애인이라는 정체성 속에서도 미국 인권 개선에 헌신하다 요절한 밀번의 얼굴이 새겨진 국민동전이 특별해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