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완섬 군기지 드론 촬영 혐의로 체포된 왕융이(왼쪽에서 다섯번째) 등 필리핀 내 화교단체 인사들이 2022년7월 루손섬 중부 타를라크시에 50만 페소의 기부금을 전달하는 모습. /타를라크시 의회 페이스북
팔라완섬 군기지 드론 촬영 혐의로 체포된 왕융이(왼쪽에서 다섯번째) 등 필리핀 내 화교단체 인사들이 2022년7월 루손섬 중부 타를라크시에 50만 페소의 기부금을 전달하는 모습. /타를라크시 의회 페이스북

1월말 필리핀 서부 팔라완섬에서 드론과 휴대전화로 군사기지와 해안경비정 등을 촬영했다가 검거된 중국인 5명 중 4명이 필리핀 장기거주자로 화교 단체 대표 등으로 활동해온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단체들은 중국 공산당의 해외 통일전선 공작을 담당하는 중화전국귀국화교연합회(중국화교연합회·ACFROC)의 관리를 받았다고 해요. 화교연합회는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산하 조직입니다.

이들은 화교단체 대표 자격으로 미군 관련 군사시설이 밀집한 루손섬 타를라크시에 50만 페소(약 1260만원)의 기부금을 전달하고, 마닐라시와 타를라크시 경찰에 오토바이 20여대도 기증했다고 해요. 필리핀 주재 중국대사관 무관과 여러 차례 만난 사실도 확인됐어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취임 이후 남중국해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고, 미국과 필리핀 간 군사 협력이 강화되자 현지 화교 네트워크를 이용해 첩보 수집 활동을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월말에는 중국인 2명이 휴대전화 도청장치를 탑재한 차량으로 수도 마닐라의 대통령궁, 미국대사관, 군기지 주변을 운행하면서 도청을 한 혐의로 체포됐어요. 올 들어 필리핀 당국에 간첩 협의로 체포된 중국인은 모두 8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체포된 단체 대표, 중 대사관 무관과 교류

로이터통신은 지난 2월28일 “중국 간첩 용의자들이 필리핀 도시와 경찰에 현금과 오토바이를 기부했다”는 제목을 단 장문의 기사를 내보냈어요. 지난 1월말 팔라완섬에서 군 기지 등을 촬영하다 체포된 5명 중 4명이 필리핀에 오래 거주한 중국인들로 필리핀 내 화교단체에서 활동해왔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2016년 필리핀중화평화발전촉진회라는 단체를 구성했어요. 2022년에는 차오싱(僑星)자원봉사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두 단체는 같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했는데 내부를 보니 중국 공산당의 해외 통일전선 담당 조직인 중국화교연합회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고 해요. 이 홈페이지는 2월말 접속이 차단됐습니다.

현지 화교 매체를 보니 체포된 중국인 간첩 용의자 왕융이(王永義)는 촉진회와 봉사단의 창립회장이고, 차이사오황(蔡少惶)은 공동 회장이었어요. 오쥔런(吳俊仁)은 이 단체 간부였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천하이타오(陳海濤)라는 인물이었어요.

이들은 필리핀 주재 중국대사관 무관인 리젠중(李建中) 인민해방군 대교(大校·우리 군의 준장급)와 교류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리 대교는 작년 5월 촉진회와 봉사단의 마닐라 사무실 개소식에 참석했다고 해요. 작년 6월에는 한 행사장에서 간첩 용의자들과 함께 친중 성향인 루손섬 카가얀주 주지사 마누엘 맘바와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필리핀 국가수사국(NBI) 하이메 산티아고 국장(앞줄 왼쪽)과 로미오 브라우너 육군참모총장이 1월30일 마닐라에서 팔라완섬에서 군사기지 등을 촬영한 혐의로 체포된 중국인 5명을 세워두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왕융이 차오싱자원봉사단장인 것으로 추정된다. / EPA 연합뉴스

◇타를라크시에 현금, 오토바이 등 기부

2022년7월에는 촉진회 창립회장인 왕융이가 루손섬 타를라크시 크리스티 엔젤레스 시장에게 50만 페소의 기부금을 전달한 사진이 중국 소셜미디어에 올라왔어요. 봉사단도 이 도시 경찰 당국에 순찰용 오토바이 10대를 기증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마닐라시 경찰에 오토바이 10대를 기부했다고 해요.

루손섬 중부에 있는 타를라크주는 군사적으로 민감한 곳입니다. 과거 미 육군이 사용한 오도넬 기지가 이곳에 있고, 미 공군이 자주 이용하는 클라크 공군기지도 멀지 않아요. 미군과 필리핀군이 함께 하는 발리카탄(Balikatan·어깨를 나란히) 연례 군사 훈련도 타를라크주 크로밸리 사격장에서 열립니다. 타를라크시는 바로 이 타를라크주의 주도입니다.

로이터 보도가 나오면서 엔젤레스 시장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는 3월5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15대의 오토바이를 선의로 받아 시 경찰 당국 등에 배분했다”고 밝혔어요. 또 2023년에 시 의회 승인 아래 봉사단으로부터 30만 페소를 받아 이 중 10만 페소를 학생들의 치아 위생 교육에 사용했고, 나머지 20만 페소는 남아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사진에 나온 것처럼 2022년 50만 페소를 받은 사실은 없다고 부인했어요. 마닐라시도 봉사단으로부터 10대의 오토바이를 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법 절차에 따라 기부가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필리핀 국가수사국(NBI)은 왕융이 등 5명의 중국인을 간첩 혐의로 기소했어요. 유죄가 인정되면 최고 20년형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필리핀판 ‘내정간섭 금지법’ 추진

필리핀은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 조직의 관리를 받는 화교단체가 지방정부에 돈을 뿌리고 내놓고 간첩 행위까지 한 사실이 드러나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에요. 롬멜 주드 옹 전 필리핀 해군 부사령관은 “중국 기업과 화교단체가 베이징의 의제를 선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중간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필리핀 지방정부는 경제적 인센티브와 기부를 통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취약하다”고 했습니다. 필리핀 대통령실은 3월3일 “기부가 선의로 이뤄졌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숨은 동기가 있다면 조사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외국의 내정 개입을 차단할 입법도 준비 중이라고 해요. 외국 단체로부터 기부를 받을 때는 대통령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으로 법안 초안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호주도 2018년 중국을 겨냥해 외국인의 정치자금 기부 등을 제한하는 일명 ‘내정간섭 금지법’을 제정한 적이 있죠.

중국 외교부는 그동안 필리핀 내에서 중국 간첩에 대한 발표가 나올 때마다 “근거 없는 억측”이라며 간첩 행위를 부인했지만 이번에는 로이터통신의 질문에 일절 응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필리핀 화교단체 차오싱자원봉사단 홈페이지에 올라온 왕융이 회장과 차이사오황 공동회장의 사진. 두 사람은 지난 1월말 팔라완섬 군기지를 드론 등으로 촬영한 혐의로 체포됐다.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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