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게 프랑스를 지탱해온 정교분리(政敎分離)·세속주의 원칙인 ‘라이시테(laïcité)’가 급진적 이슬람 세력의 확산과 이에 대한 우파 세력의 반발 속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프랑스에선 2011년 이후에만 170여 건의 이슬람 테러로 280명이 넘게 희생됐다.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경각심이 갈수록 커지면서, 애초 중도를 표방하고 취임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0일 ‘라이시테에 대한 사회 대토론회’를 출범했다. 그러나 “도시들을 에워싼 교외의 무슬림 떼에 프랑스가 해체되고 있으며, 방치한다면 군이 개입할 것”이라는 예비역 장성 20여 명이 주도했던 공개 서한엔 이미 전현직 장교 수백 명이 지지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크롱 정부, 7월까지 ‘라이시테 삼부회(三部會)’ 개최
마를렌 시아파 양성평등부 장관은 “7월까지 라이시테에 대한 대토론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라이시테에 대한 역사적인 삼부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1302년 프랑스의 세 신분이었던 귀족·가톨릭 고위성직자·평민 대표자들이 처음 모여 세금을 비롯한 주요 의제를 토론한 것에 빗댄 것이다.
흔히 ‘프랑스식 세속주의’로 번역되는 ‘라이시테’는 간단히 말해 ‘프랑스에선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고, 국가는 엄격히 중립을 지키고, 국가[정부]는 어떠한 종교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무원은 십자가·히자브(hijab)·키파(유대인 남성의 모자)와 같은 종교적 의상이나 상징물을 공공시설에서 공무 중에 착용해선 안 된다. 학교에서 기도회나 종교 행사·모임도 금지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부활절·성모승천대축일 등은 예외적으로 공휴일이다.
◇애초 가톨릭 교회와 계몽주의자들 간 투쟁에서 시작
‘라이시테’ 투쟁은 이성과 보편적 가치를 주장하는 계몽주의자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가톨릭 교회가 지닌 장악력을 제거하기 위해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1905년 ‘라이시테’의 정신을 담아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법’이 제정됐다. 또 1946년 프랑스 헌법 1조는 “프랑스는 불가분적,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이라고 밝혔다. 대토론회를 주관한 시아파 장관은 “라이시테는 지난 100년간 프랑스의 운명이 기초한 원칙”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라이시테’는 가톨릭 권력에 대항하던 멕시코와 같은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슬람과 국가를 분리하며 세운 근대 터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現) 터키 대통령은 이를 되돌리려고 한다.
◇이슬람과의 싸움으로 변한 ‘라이시테’
그러나 1989년 파리 북부의 크레유에서 히자브를 쓴 학생 3명이 정학을 받은 이래, 지난 30년간 ‘라이시테’는 이슬람과의 싸움이었다. 1950년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들이 대거 유입됐고, 1980년대말부터 프랑스에는 급진적 이슬람주의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슬람(5%)은 이제 프랑스에서 가톨릭(41%)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사람이 믿는 종교다.
프랑스 정부는 이른바 ‘히자브(hijab·머리수건) 금지법’(2004년)으로 공립학교에서 “두드러지게 종교적 상징이나 의상의 착용”을 금했고, 2010년에는 ‘보안’을 이유로 얼굴 전체를 가리는 니카브(niqab)를 공적 공간에서 금지했다. 심지어 지방자치단체들은 전신(全身)을 감싸는 무슬림 수영복인 부르키니도 해변에서 금지하려고 했다.
◇내년 대선의 최대 화두(話頭)로 변해
도시의 교외 지역들을 무슬림이 장악하고 이슬람 분리주의와 급진적 이슬람 좌파가 세력을 얻으면서, 우파와 극우파의 위기 의식은 고조됐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이슬람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주장하는 극우파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과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이 매우 비슷하게 나왔다. 마크롱으로선 내년 4월 대선에서 최소한 우파를 끌어안으려면, 보다 ‘엄격한 라이시테’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라이시테에 대한 대토론회’ 개최도 그 일환이었다.
프랑스 의회는 최근 이슬람 교육기관과 이슬람에 입각한 홈스쿨링(home schooling)과 사립교육을 억제하는 정부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탈식민주의와 이슬람 정체성에 대한 교육이 조국 프랑스에 대한 증오를 낳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지난 2월 프랑스 정부는 ‘정체성(正體性)’을 강조하는 미국식 학문의 유입도 공격했다. 탈식민주의와 이후 구(舊)식민지에서 유입된 무슬림 인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미국식 ‘부족주의 정치학’과 급진적 행동주의, 다(多)문화주의가 ‘라이시테’에 기초한 프랑스의 정체성과 사회적 결속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작년 10월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장관은 “슈퍼마켓에서 이슬람 음식인 ‘할랄’ 코너를 폐지하라”고 해서 논란이 됐다.
◇반대파 “라이시테를 이슬람 탄압의 무기로 삼는다” 비판
프랑스의 보수주의 지식인들은 “라이시테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프랑스 사회를 ‘정체성’에 따라 쪼개려는 이슬람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2019년 2월 스포츠 유통업체 데카슬론은 ‘러닝 히자브’를 판매했다가, ‘라이시테’에 어긋난다는 논란에 빠졌다. 사기업이 개인에게 종교적 상징을 띤 물품을 판매하는 것은 당연히 보호되는 권리인데도, 결국 데카슬론은 여론에 밀려 판매를 중단했다.
애초 ‘국가의 중립’을 원칙으로 했던 세속주의가 개인과 사적인 영역에서도 ‘종교적 중립’을 강요하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그래서 반대파에선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채택한 ‘라이시테’의 이름으로 개인의 종교를 침해하고, ‘라이시테’를 이슬람공포증을 당연하게 여기게 하는 무기로 쓴다”고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