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오는 5월 6일 코로나 사태로 1년 미뤄둔 지방선거를 치른다. 최고 관심사는 수도 런던을 이끄는 시장에 누가 선출되느냐다. 이번 런던 시장 선거는 백인 남성이 주도해온 영국 정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무대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노동당은 파키스탄계 무슬림을, 보수당은 자메이카계 흑인을 각각 후보로 내세워 전례 없는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노동당에서는 2016년 당선된 사디크 칸(51) 현 시장이 재선 도전에 나선다. 칸은 최초의 무슬림 런던 시장이다. 파키스탄에서 이민 온 부모 사이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칸은 ‘흙수저’ 신화를 쓴 인물이다. 아버지는 버스 운전사,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의 가족 10명은 방 3개짜리 공공주택에 살았다.
변호사가 된 칸은 2005년 하원 의원에 당선돼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고든 브라운 행정부 시절 지역사회부와 교통부에서 차관을 잇따라 지내며 경력을 키웠다. 칸은 2016년 런던 시장 선거에서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금수저’ 이미지를 갖고 있던 보수당의 백인 후보 잭 골드스미스를 여유 있게 누르고 승리했다.
보리스 존슨 현 총리가 8년간 지켜온 런던 시장을 2016년 노동당에 빼앗긴 보수당은 파격적인 카드를 내밀어 칸에게 도전하기로 했다. 2018년 시장 후보를 뽑는 당내 경선에서 자메이카 이민 2세인 숀 베일리(50) 런던 시의회 의원을 선택했다. 기존 보수당 이미지를 완전히 불식시킨 새로운 후보를 내세워야 칸 시장에 대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먹혀들어간 결과였다. 베일리는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도쿄 올림픽이 열리지 못할 처지가 되자 런던이 대신 개최하자고 제안해 화제를 모았다.
베일리는 조부모, 고모, 삼촌 등과 함께 공공임대주택에서 자랐다. 전형적인 ‘빈곤층 이민자 가정의 비행 청소년’이었다. 그는 BBC에 출연해 “어린 시절 친구들과 강도짓을 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축구장 경비원, 공장 청소원, 맥주 배달원으로 일한 돈을 모아 남들보다 늦게 대학에 진학해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자신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청소년을 돕겠다며 2006년 ‘마이제너레이션’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베일리가 이민자나 유색인종에 친화적이지 않은 보수당에 발을 들여놓은 건 2010년 총리에 취임한 데이비드 캐머런이 그를 청소년 범죄 담당 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이 계기였다. 2010년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 런던의 신생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노동당 후보에게 고배를 마신 베일리는 2016년 런던 시의회 의원이 됐다.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공방전도 뜨거워지고 있다. 베일리는 칸 시장이 재임하는 기간 런던에 범죄가 늘었고 고질적인 주택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고 공격한다. 경찰관을 8000명 추가 채용하고, 주택사업체와 입주민이 공동 소유하는 신개념 주택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이에 맞서 칸도 새로운 공공주택 1만채를 공급하고 경찰관 6000명을 추가 채용할 수 있도록 예산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런던 시장 선거의 특징은 사실상 ‘백인 남성이 사라진 선거’라는 것이다. 보수·노동당에 이어 ‘제3의 정당'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인 녹색당과 자유민주당은 모두 백인 여성 후보를 내세웠다. 10여명의 군소 후보가 있지만 ‘빅4’ 가운데 백인 남성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백인 주류 사회의 반감도 적지 않다. 특히 베일리의 선거 캠프에는 유색 인종에 대한 증오가 담긴 편지가 자주 날아들고 있다. 보수당 후보가 흑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영국 언론들은 일단 칸 시장의 재선 성공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원래 런던은 전통적으로 노동당이 강세를 보였고,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의 충격으로 보수당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다. 지명도에서도 베일리가 칸 시장에게 밀린다. 이달 13~19일 사이 민영방송 ITV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칸 시장은 41%의 지지율로 28%인 베일리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다. 그러나 두 후보 간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베일리의 지명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영국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