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극좌 성향인) 좌파당과는 (절대) 손을 잡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민당 총리 후보인) 올라프 숄츠는 좌파당과 연정을 꾸릴지도 모릅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 도중 이렇게 말했다. 메르켈이 극좌 정당과 손잡을 수 있는 ‘위험 인물’이라고 공격한 대상은 현직 부총리 겸 재무장관인 올라프 숄츠다. 메르켈이 이끄는 중도우파 기민·기사당 연합은 중도좌파 사민당과 연정을 꾸리고 있다. 숄츠는 경제 부총리 자리를 유지하면서 오는 26일 실시되는 총선에서 사민당의 총리 후보로 나섰다.
이날 메르켈은 자신의 경제 부총리로 3년 넘게 손발을 맞춰온 숄츠를 정면으로 겨냥하며 정치적 노선의 차이를 부각했다. 메르켈은 “나와 숄츠 사이는 독일의 미래를 두고 큰 차이가 있다”고 했다. 평소 온화한 모습과 달리 메르켈은 초조함을 드러내며 공격적이었다.
메르켈이 숄츠를 공개적으로 저격한 이유는 이번 총선에서 사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8월을 기점으로 기민·기사당 연합은 지지율이 추락하고 중도좌파인 사민당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있는 추세가 뚜렷하다. 16년째 재임 중인 메르켈이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이미 밝혔기 때문에 이번 선거는 그의 뒤를 잇는 후임 총리를 정하는 무대다.
사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더라도 크게 6개 정당이 경쟁을 벌이는 독일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연정을 꾸릴 수밖에 없고 어떤 정당 간 조합이 등장하느냐에 따라 국정 방향도 다소 달라진다. 메르켈이 공격한 대로 사민당이 극좌 성향의 좌파당과 손잡을 경우 정책 노선에서 상당한 좌향좌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론조사 회사 인사의 8월 말 조사에서 기민·기사당 연합은 지지율 20%로 25%인 사민당에 5%포인트 차이로 밀렸다. 7월 말 같은 조사에서 27% 대 17%로 기민·기사당 연합이 10%포인트 앞선 것에 비하면 한 달 만에 선거판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8월 말 발크라이스프로노제 조사에서는 기민·기사당 19.5%, 사민당 27%로 차이가 7.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독일 언론들은 선거 판도가 급변해 여당이 코너에 몰리자 메르켈이 다급한 나머지 직접 선거전에 뛰어들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기민·기사당의 지지율 추락은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여론조사 회사 포르자는 8월 23일 기민·기사당 연합 22%, 사민당 23%라는 지지율 조사를 발표했는데, 이 회사 조사에서 사민당이 기민·기사당 연합의 지지율을 넘어선 건 15년 만에 처음이다. 22%인 기민·기사당 지지율은 1984년 포르자가 설립된 이후 가장 낮다.
총선을 목전에 두고 우파 여당의 지지율이 추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총리 후보의 인물 경쟁에서 완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르켈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는 기민·기사당 연합의 총리 후보 아르민 라셰트는 7월 대홍수 피해 현장에서 활짝 웃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은 이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주지사를 맡은 것 외에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다.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도 메르켈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많다.
사민당의 숄츠는 경제 부총리로서 코로나 사태 극복에 앞장섰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경험 많은 정치인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그는 이전에 노동부 장관, 함부르크 시장, 사민당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지난주 여론조사 회사 발렌에 따르면, 총리 후보 선호도에서 숄츠는 49%로 17%인 라셰트를 압도했다. 숄츠는 최근 “사회민주주의자가 다시 총리가 될 수 있다”며 총선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아프가니스탄 사태, 코로나 팬데믹 등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독일인들이 숄츠에게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사민당이 원내 1당이 되면 16년 만에 재집권하게 된다. 유럽 3대국인 독일·프랑스·영국에서 2017년 이후 모두 우파가 집권해온 구도가 깨진다. 사민당은 좌파 정당답게 아프간 난민 수용에 있어서 기민·기사당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럽 전체의 난민 수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일 언론들은 사민당이 집권하면 저소득층 복지를 늘리는 방향으로 정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인상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