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가운데) 터키 대통령이 29일(현지 시각)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상에 앞서 양국 대표단에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제는 구체적인 결과를 내야 할 시점”이라며 “이 비극을 끝내는 건 여러분의 손에 달렸다”고 말했다./AFP 연합뉴스

29일(현지 시각)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5차 평화협상에서 러시아 대표단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와 북부 체르니히우에서의 군사 활동을 크게 줄이겠다고 밝혔다. 양측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 회동 가능성도 제기했다. 지난달 24일 개전 이후 한 달 넘게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 또는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날 회담에 참석한 러시아 국방부의 알렉산데르 포민 부장관은 “키이우 외곽과 체르니히우 등 두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대폭(drastically) 줄이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가 군사 활동 감축을 발표한 것은 처음이다. 러시아 측 관계자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대로 더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해 러시아의 군사 행동이 향후 크게 감소할 것을 시사했다. 우크라이나군도 “키이우와 체르니히우 지역에서 러시아군 일부 부대가 철수하는 것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열린 이날 협상은 오전 10시부터 4시간가량 진행됐다. 러시아 협상단 부대표 알렉산데르 포민 국방부 부장관은 “(오늘 협상은) 상호 신뢰를 높이고 향후 추가 협상의 올바른 방향을 끌어내 우크라이나와 (최종적으로)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목표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측은 협상이 끝난 뒤 “건설적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이날 협상에서 “러시아에 새로운 안보 보장 시스템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협상단에 참여한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실 보좌관은 “안보가 보장된다면 중립국 지위를 채택하는 데 동의하겠다”며 “중립국 지위가 될 경우, 우크라이나 내 외국 군사기지를 유치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터키를 잠재적 안보 보장국 중 하나로 보고 있다”며 “이스라엘, 폴란드, 캐나다 등도 새로운 안보 보장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포돌랴크 보좌관은 새로운 안보 보장 시스템의 최종 합의 여부는 국민 투표에 부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선거를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 모두가 이번 협정에 대한 입장을 표명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민들의 승인을 거친 뒤에야 의회의 비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양측은 지난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 문제도 거론했다. 포돌랴크 보좌관은 “앞으로 15년 동안 크림반도의 지위에 대해 협의하고, 그동안에는 군사적 교전을 벌이지 않기로 논의했다”고 말했다. 당분간 크림반도는 현 상황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협상에 진전이 생김에 따라 양국 정상 간 회담이 전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크라이나의 포돌랴크 보좌관은 “양국 대통령 간 회담을 할 정도로 충분한 진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협상단을 이끈 블라디미르 메딘스키 러시아 대통령 보좌관은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만날 수도 있어 이에 관한 구체적인 시간표 작성에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 정상의 정상회담은 양국 간 조약이 준비되는 대로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관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은 러시아 협상 대표단을 인용해 “양국 정상의 회동과 함께 양국 외무장관의 평화협정 체결도 동시에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날 협상에 앞서 양측에서 긍정적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협상 관계자 4명을 인용해 “러시아가 그동안 강조해 온 우크라이나 ‘비무장화’와 ‘탈나치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자 법적 보호’ 등을 더는 협상 의제로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해 협상이 급물살을 탈 수 있음을 시사했다. 특히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포기와 다른 국가의 군사기지 유치 포기 등을 약속할 경우,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가 이미 안전 보장책이 마련된다면 나토 가입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런 태도 변화는 협상 타결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우크라이나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 친러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동부 돈바스 지역과 관련된 내용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다고 언급하는 등 유연한 자세로 협상에 나섰다. 지금까지 그는 돈바스 지역 등 영토에 대한 이슈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양국 평화 회담이 긍정적 결과를 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과 유럽의 증시가 일제히 상승세를 보였고, 유가는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기준 5% 가까이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