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피해 연안의 산유국인 아제르바이잔이 자국 내 영토이면서도, 인구의 95%가 이웃국가인 아르메니아계가 차지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공격해, 하루 만인 20일 이 지역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아르메니아계 아르차흐 공화국 세력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1918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독립한 이래,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을 놓고 1920년부터 다퉈왔다. 과거 소비에트연방(소련)에 속했던 두 나라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이 곳을 서로 차지하려고 1992년부터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현재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된다. 그러나 12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계 인구는 별도의 공화국을 세우고 아르메니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요구해왔다.

아제르바이잔 국방부는 20일, 자국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존재하는 아르메니아군 초소라며, 드론 촬영 사진을 공개했다. /AP 연합뉴스

가장 최근인 2020년에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놓고 44일 간 전쟁을 벌여 양측에서 6500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숨졌다.

이후 러시아가 휴전을 중재하고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잇는 유일한 회랑(corridor)인 ‘라친 회랑’에 러시아 평화유지군 1960명을 배치해 캅카스 지역의 ‘평화 대부(代父)’ 노릇을 해왔다. 라친 회랑은 아르메니아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로 식량과 의약품, 생필품이 유입되는 유일한 ‘생명선’이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그러나 아르메니아가 유일하게 자국의 안보를 보장해 줄 국가로 신뢰하던 러시아가 작년 2월 말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에 발이 묶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주축이 되고, 벨라루스ㆍ카자흐스탄ㆍ키르기스스탄ㆍ타지키스탄 등 6개국이 참여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라친 회랑에 배치한 러시아군도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했고, 이 틈을 노려 아제르바이잔은 지난 9개월 간 라친 회랑을 봉쇄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또 아르메니아의 숙적(宿敵)인 터키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다.

아제르바이잔 군은 이어 19일 “테러 소탕 작전” 명목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로 진격했고, 최소 200명의 민간인이 죽고 400명 이상이 다치는 유혈 진압 끝에 아르메니아계 공화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분리주의 세력인 아르차흐 공화국은 무장 해제 및 정부 해체, 아제르바이잔과의 재통합을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의 유일한 안보 후원자인 러시아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20일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 시민들이 정부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공격을 막지 못한 것에 항의하며 "아르차흐(Artsakh) 공화국에서 전쟁이 끝나면, 아르메니아계에 대한 인종학살이 따를 것"이라고 시위하고 있다. 아르차흐 공화국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아르메니아계 공화국을 말한다. /EPA 연합뉴스

◇푸틴, 친(親)서방 아르메니아에 일부러 따끔한 경고?

러시아의 이런 ‘무기력한’ 대응에 대해서는 푸틴이 갈수록 친(親)서방 정책을 취하는 아르메니아 정부를 일부러 손을 본 것이라는 분석과, 러시아 제국이 발 밑인 남(南)캅카스 지역에서부터 무너진다는 전망이 혼재한다.

아르메니아의 니콜 파시냔 총리는 그동안 계속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이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해왔다. 러시아의 올해 CSTO 훈련 개최 요구도 거부했고, 지난 6월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파시냔 총리는 이달 초에는 아내와 함께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해 처음으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약속했다.

또 이 달에는 아르메니아군 175명이 ‘국제평화유지 능력 향상’이란 목적으로 미군 85명과 함께 수도 예레반 인근의 군 캠프 두 곳에서 20일까지 11일 간 연합 훈련을 했다. 작년 9월엔 아르메니아 역사상 미국 최고위층 인사인 낸시 펠로시 당시 미 하원의장이 아르메니아를 국빈 방문했다.

아르메니아에는 러시아군 기지도 있다. 이 탓에,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군의 방문은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관련, 아제르 관리들은 월스트리트저널에 러시아 측에 이번 공격의 의도와 시기를 미리 통보했지만, 러시아 측이 친서방 노선을 걷는 파시냔 총리의 정권 교체를 노리며 아제르의 공격 계획을 아르메니아에 알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럽 카네기 재단의 토마스 드 왈 선임연구원은 “러시아가 원하면 (아제르 공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텐데, 방치한 것 같다”고 더 타임스에 말했다.

그러나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재연(再燃)되고 러시아가 과거 소련 공화국이었던 두 나라 사이의 일을 막지 못했다는 점,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와 맺은 방위조약이 도움이 안 됐다는 점 등은 CSTO의 다른 회원국인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도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며 “러시아 제국은 푸틴의 눈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