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5월 치러지는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대통령의 딸’과 ‘필리핀의 복싱 영웅’의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76) 필리핀 대통령의 장녀 사라 두테르테(43) 다바오시 시장과 복싱 세계 챔피언으로 잘 알려진 매니 파키아오(43) 상원의원이 강력한 후보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는 지난달 “대선 출마에 마음이 열려 있다”고 밝혔지만 공식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필리핀 현지 언론은 사라의 대선 출마를 기정 사실로 다루고 있다. 필리핀 여론조사 업체 ‘펄스 아시아 리서치’가 7월 13일 발표한 조사에서 사라는 대선 주자 지지율 28%로 1위를 차지했다.
사라의 대선 출마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치밀한 정권 유지 전략에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필리핀 대통령은 6년 단임제여서 두테르테는 다시 대선에 나설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을 제외한 다른 선출직에는 출마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두테르테가 사라를 대선 후보로 세우고, 자신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 권력 연장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테르테는 지난달 “딸의 (대선) 출마를 응원한다”면서 자신에 대해선 “부통령 선거 출마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집권 여당인 필리핀민주당(PDP)도 지난 6일(현지 시각) “두테르테 대통령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해주기를 원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변호사 출신인 사라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필리핀 제2의 도시인 다바오 시장일 당시 아버지 밑에서 부시장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시장 3선 연임 제한 규정에 걸리자 2010년 아버지 대신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아버지 후광으로 2016년 재선에 성공했다.
사라는 아버지만큼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하다. 다바오 시장을 지내던 2011년 철거민과 협상을 거절한 경찰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른 적이 있고, 아버지의 대선 출마를 권유하며 삭발을 감행하기도 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그(사라)는 아버지처럼 직설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평했다.
사라의 가장 최대 경쟁자는 파키아오 상원의원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길바닥 주먹 싸움으로 권투를 시작한 파키아오는 복싱으로 세계를 제패하며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 2007년 처음 출마한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는데, 그가 은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필리핀 국민이 일부러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2010년 하원의원, 2016년엔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파키아오는 지난달 AFP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인이고 모든 정치인은 더 높은 위치를 꿈꾼다”며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그의 대변인도 CNN필리핀에 “파키아오가 대선에 출마할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집권 여당 PDP 소속인 파키아오는 원래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두테르테의 신임도 두터워 지난해 12월 PDP 대표로도 선출됐다. 하지만 7개월 만인 지난 6월 파키아오는 당대표직에서 쫓겨났다. 두테르테 대통령과 각을 세웠기 때문이다. 파키아오는 지난 6월 중국이 남중국해 영향력을 강화하는 행태에 대해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지난달엔 “두테르테 대통령이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가로챈 증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파키아오는 당시 “나의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패를 막는 것”이라고 했다.
필리핀 현지 언론 인콰이어러는 “파키아오가 두테르테와 대립하기 시작한 건 두테르테가 부통령 출마를 부인하지 않은 뒤부터”라며 “(파키아오가)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독립 노선을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자신에게 각을 세우는 파키아오에게 두테르테는 “더러운 자식”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파키아오의 지지율은 아직 8%대에 불과하지만 현재 두테르테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꼽힌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3일 “필리핀에서 두테르테의 지원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있는 사람은 파키아오 한 명뿐”이라며 “두테르테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