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화천연가스 수송선./로이터 연합뉴스

천연가스와 석탄, 원유 등의 가격이 최근 급상승하면서 세계 곳곳의 저소득층이 ‘혹독한 겨울’을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의 여파를 극복해가고 있는 세계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천연가스와 원유를 수출하는 러시아·중동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6일(현지 시각)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기준이 되는 네덜란드 TTF 거래소의 천연가스 가격은 장중 메가와트시(MWH)당 133유로(약 18만3000원)까지 치솟았다. 지난 6월 초 26유로(약 3만5800원)였는데 4개월 사이 5배 이상으로 오른 것이다. 천연가스 저장 시설이 특히 부족한 영국은 이날 한때 도매용 가스 요금이 연초 대비 7배까지 올랐다. 천연가스는 냉난방 원료일 뿐 아니라 화학 제품, 유리, 종이 등의 가공에도 쓰인다. 특히 유럽은 전기 생산 때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원유·석탄 가격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5일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은 배럴당 78달러(약 9만3000원)대까지 올라 연초 대비 61% 상승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WTI 가격이 연말 100달러를 넘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국제 석탄 가격의 표준이 되는 호주산 석탄 지수는 최근 6개월 사이 2배로 올랐다.

영국 경제분석가 빌 블레인은 자신의 뉴스레터에서 “이번 겨울 전 세계가 혹독한 추위를 경험할 것”이라며 “영국은 어디든 에너지가 있는 곳이라면 무릎을 꿇고 구걸할 것이며 유럽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미 10월부터 잔인한 달이 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심지어 (다음 달)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릴 유엔기후회의에서도 정전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6개월간 천연가스 선물 가격 추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에너지 가격이 오르는 원인은 복합적이다.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며 세계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는 과정에서 에너지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강력한 친환경 규제의 부작용이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탄소 중립 정책에 영향을 받아 석탄을 비롯한 화석 연료 채취가 감소해 공급 부족으로 인한 가격 상승이 초래됐다는 것이다.

유럽 천연가스 대란은 러시아가 수출을 줄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천연가스 가공 공장에서 화재가 있었다고 했지만 에너지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의도라는 의심이 나오고 있다. 유럽은 천연가스 사용량의 약 40%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전 세계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화석 연료 수출 국가인 러시아와 중동의 입김이 강해질 전망이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의 에너지 주권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트해 해저를 지나 독일로 연결되는 천연가스 수송관인 ‘노르트스트림2′는 올해 안에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렇게 될 경우 푸틴의 ‘파이프라인 정치 게임’은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주요 4개 경로(독일·벨라루스·우크라이나·터키)의 천연가스 수송관이 완성되면서 푸틴은 유럽의 에너지 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2009년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천연가스관을 열흘 넘게 잠그라고 지시해 프랑스·이탈리아까지 타격을 입힌 적이 있다.

푸틴의 위력은 벌써 가시화되고 있다. 6일 네덜란드 TTF 거래소의 천연가스값은 장중 최고 133유로에서 101유로까지 내리며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순전히 “세계 에너지 가격 안정을 위해 힘쓰겠다”는 푸틴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푸틴은 “유럽의 천연가스 부족은 (러시아와) 장기 계약을 하지 않은 유럽 국가들 탓”이라고 주장하며 길들이기에 들어갔다. 빌 블레인은 “(올겨울) 중동은 의기양양하게 청구서를 내밀 것이고 푸틴은 유럽의 지도자들에게 왜 가스관 꼭지를 열어줘야 하는지 위협적으로 질문할 것”이라고 했다.

유럽은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EU(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다음 주 친환경 규제가 적합한지 검토하기로 했다. 강력한 탄소 중립 정책이 에너지 가격을 끌어올린다는 주장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를 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은 EU가 천연가스를 공동으로 구매하고 비축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처지가 양호한 독일·네덜란드 등이 EU 차원의 시장 개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