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95)이 공식 행사 일정을 또 취소했다. 지난달 20일 북아일랜드 방문을 취소한 이후 벌써 네 번째 주요 일정 취소다. 영국 BBC와 일간 데일리메일은 14일(현지 시각) “여왕이 이날 오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세너타프(Cenotaph·전몰 장병 추모비)에서 열리는 영령기념일(현충일) 추도 예배 행사 참석을 막판에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버킹엄궁은 공식 성명을 통해 “여왕이 허리를 삐었으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추도 예배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영령기념일은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 국가와 프랑스, 벨기에 등 주요 유럽 국가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발생한 주요 무력 분쟁에서 희생된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 오전 11시를 기해 2분간 묵념을 하고, 종전일에 가장 가까운 토요일 저녁 로열 알버트홀에서 전몰자 추모 행사를, 일요일 오전에 추모 예배를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952년 즉위 이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년 토요일과 일요일 행사에 모두 참여해 왔다. 특히 이날의 현충일 추도 예배는 여왕이 무려 25일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의 건강을 확인시켜 줄 기회였다. 여왕은 지난달 20일 런던의 에드워드 7세 병원에 하루 입원하면서 당일 예정됐던 북아일랜드 방문 일정을 취소했다. 버킹엄궁은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의 ‘사전 검진’을 위해서”란 이유를 댔다. 당시 영국 언론들은 “11월 1일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정상회의 리셉션에 참석하기 위해 충분한 휴식을 갖는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여왕은 지난달 26일 COP26 참석도 취소하고 다시 2주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의료진이 적어도 2주 이상 더 쉬면서 가벼운 업무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한 데 따른 것”이라는 해명이 나왔다. 이로 인해 COP26 환영사는 동영상으로 대체하고, 2주 휴식 권고에 따라 13일 예정됐던 전몰자 추모 행사 참석도 취소했다.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자, 버킹엄궁은 지난 11일 “엘리자베스 여왕이 14일 영령기념일 추도 예배에 예정대로 참석한다”는 성명을 별도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왕의 공식 행사 취소가 또 발생한 것이다.
여왕의 칩거가 반복되고 길어지자 그 이유를 놓고 여러 추측도 쏟아지고 있다. 버킹엄궁의 공식 부인에도, 영국에서 재확산 중인 신종 코로나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왕이 코로나에 감염될 경우 위험한 상황에 이를 가능성 때문에 의료진이 여왕의 면역력 수치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으며, 면역 수치가 높지 않아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남편 필립공과 사별한 이후 여왕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최근 “여왕이 혼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려 가족·친구들과 계속 점심·저녁을 같이 하고, 밤늦게까지 TV를 시청한다”며 “이런 빡빡한 일정으로 여왕이 쇠약해졌다”고 주장했다.
영국인과 영연방 국가들의 근심도 깊어지고 있다. BBC는 “여왕의 건강이 영국 사회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그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올해로 69년째 왕좌를 지키고 있는 세계 최장수 군주다. 2차 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 쇠퇴와 국제적 위상 하락 과정에서 영국 내 분열된 여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54국이 여전히 영연방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엘리자베스 여왕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건재하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여왕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경우, 영연방 탈퇴를 선언하는 국가가 잇따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은 여왕만 한 무게감이 없고, 인기도 높지 않다. 찰스 황태자는 1996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이혼하고 커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하면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은 상태다. 차기 왕위가 윌리엄 왕세손으로 곧장 이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고 있지만 윌리엄이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존재감을 대신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상태다. 지난달 20일 영연방 국가인 바베이도스가 대통령을 뽑아 국가원수로 삼으면서 이런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바베이도스는 1966년 독립 후 55년간 여왕을 국가원수로 삼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