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새해 벽두부터 전 세계가 원자력 발전에 주목하고 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면서, 안정적이고 싸게 대량의 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원전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 수년간의 논란 끝에 원전을 친환경 ‘녹색 투자’에 포함할 예정이고, 미국과 일본은 차세대 고속 원자로 사업에 함께 뛰어들기로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로이터통신 등은 1일(현지 시각) “EU가 원자력과 천연가스 발전에 대한 투자를 이달 중 ‘녹색 투자’로 정식 분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EU 집행위원회가 31일 회원국에 보낸 녹색 분류 체계(그린 택소노미) 초안에 원자력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이 초안에 따르면, 앞으로 원자력 발전에 대한 투자 사업은 계획과 조달된 자금이 있고, 방사성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분할 곳(방사능 폐기물 처분장)이 있으면 환경과 기후에 친화적인 ‘지속가능한 녹색 투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원전을 녹색 에너지에서 제외하고, 원전에 대한 투자도 녹색 투자에서 제외한 한국과 정반대 행보다.
EU의 녹색 분류 체계는 금융 시장의 친환경·기후대응 투자뿐만 아니라, EU의 친환경 산업 자금 지원에도 적용된다. 즉 원전에 EU 시민의 세금을 투자할 수 있는지를 가름 짓는 것이다. 이 때문에 원자력의 녹색 분류 체계 편입을 놓고 EU 회원국 간에 논쟁이 뜨거웠다. 프랑스와 폴란드, 체코, 핀란드 등 전력 생산의 70% 이상을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찬성했지만 탈원전을 추진해 온 독일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덴마크 등은 반대 입장을 취해 왔다.
독일 쥐트도이체자이퉁은 “EU는 원자력 발전이 (방사능 폐기물을 발생시키므로) 완전히 지속가능한 에너지라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어 탄소 중립 사회로 가는 과정의 ‘전환기적 에너지’로 유용하다고 봤다”고 분석했다. EU는 이달 중 EU 의회에서 27개 회원국 대표들의 표결을 통해 원자력 발전의 녹색 분류 체계 편입을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미국도 올해부터 차세대 고속원자로(고속로) 개발 사업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미국 정부와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 손잡은 민관 협력 사업이다. 빌 게이츠는 벤처기업 테라파워를 설립해 고속로 기술에 기반을 둔 소형모듈원전(SMR) 건설을 추진해 왔다.
테라파워와 미국 에너지부는 최근 와이오밍주(州)에 출력 34만5000킬로와트(㎾)급의 SMR을 지어, 2028년 운용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약 40억달러(약 4조7600억원)의 건설 비용은 테라파워와 미 연방 정부가 절반씩 부담한다.
고속로는 기존의 경수로(경수로)와 달리 액체 금속 나트륨(소듐)을 냉각재로 이용하는 원자로다. 경수로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쓸 수 있어 원자력 발전의 지속가능성을 더 높여준다.
이 사업은 일본이 참여를 선언하면서 국제적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됐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1일 “일본이 미국 차세대 고속로 개발 계획에 참가하기로 하고 이르면 1월 중 협력 합의서를 교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 기관인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와 미쓰비시중공업이 민관 합동으로 참여한다.
일본은 이미 1980년대에 고속로 개발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실험용 고속 원자로 ‘몬주(文殊)’를 만들어 1995년 실제 운용도 시작했지만 넉 달 만에 냉각재인 액체 나트륨이 새는 사고가 발생해 가동이 중단됐다. 몬주는 이후 12년간 보완 공사만 거듭하다, 2016년 폐로가 결정됐다. 요미우리는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축적한 고속로 기술과 운용 데이터를 미국에 제공하고, 이바라키현의 실험로에서 공동 시험도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한국이 원자력을 구시대 에너지로 낙인찍고 성급한 탈원전을 추진하는 동안 유럽·미국·일본 등 다른 나라들은 원전 개발에 다시 나선 것이다. 중국 시진핑 주석도 최근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화상 정상회담을 통해 “러시아의 최신 원전기술을 도입해 새 원전을 짓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정부 고위 인사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10년 이상이 지났고, 에너지 가격 급등까지 겪으며 원전에 대한 국민의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원자력은 오늘날 세계가 처한 에너지 문제를 풀어줄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