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타 로이터=연합뉴스) 21일(현지시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조건부로 낙태를 허용하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오자 여성들이 환호하고 있다. 콜롬비아 헌재는 이날 임신 24주 이내의 낙태를 형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가운데, ‘낙태 합법화’ 논란이 전 세계 곳곳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전통적으로 낙태에 가장 부정적이었던 가톨릭 국가에서 최근 낙태를 허용하는 조치가 잇따르는가 하면, 미국·중국 등 주요국에선 오히려 더 강력한 낙태 규제가 새로 생겨나 큰 사회·정치적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낙태 합법화 바람이 가장 뜨거운 곳은 가톨릭 인구가 절대 다수인 중남미다. 콜롬비아의 최고 법원인 헌법재판소는 21일(현지 시각) “임신 24주까지의 낙태를 처벌하지 않겠다”면서 “정부와 의회는 이른 시일 내 관련 정책을 마련하라”고 밝혔다. 콜롬비아는 그동안 임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 태아가 생존이 어려운 심각한 기형을 지닌 경우,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인 경우를 제외하곤 모든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임신 중기인 6개월까지의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전면 허용과 다름없다.

그간 다양한 시위와 캠페인으로 이번 헌재 결정을 이끌어낸 콜롬비아의 ‘정당한 이유(causa Justa)’ 등 중남미 여성단체들은 “역사적 결정”이라며 환호했다. 이들에 따르면 콜롬비아 여성들은 기존의 낙태 처벌법 때문에 지난 15년간 350여 명의 여성이 징역형을 살았고, 이 중 80%가 18세 미만 소녀였다. 불법 낙태 시술을 하다 매년 70여 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는다는 통계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의 상원 의회가 지난 2020년 12월 8일(현지시간) 임신 초기의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놓고 표결하기에 앞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태아 모형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모습. /AFP 연합뉴스

중남미에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루과이와 쿠바, 가이아나 3개국만 낙태가 합법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여러 나라가 잇따라 낙태 합법화 조치를 내놓으면서 낙태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이자 인구 77%가 가톨릭 신자인 아르헨티나에선 지난 2020년 12월 역사상 처음 임신 14주 이내의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당시 아르헨티나 상원 표결 전날 교황은 “모든 버려진 이들은 신(神)의 자녀”란 글을 트위터에 올려 낙태 합법화에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에선 매년 최대 52만건의 불법 낙태 시술이 이뤄졌으며, 이로 인해 지난 40여 년간 3000여 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멕시코 대법원도 지난해 9월 “낙태 금지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직후 칠레 하원 의회도 임신 14주 내 낙태 허용안을 통과시켜 현재 상원에서 논의 중이다. 에콰도르 의회는 지난 17일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 중절은 범죄가 아니다”라며 낙태를 일부 허용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낙태죄를 시행했던 엘살바도르에선 최근 낙태로 3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여성이 10년 만에 석방되는 등, 사법부가 낙태죄에 대한 전향적 판결을 연이어 내리고 있다.

지난 2020년 폴란드 극우 정권이 낙태를 사실상 원천 금지하자 수도 바르샤바 주요 도로에서 폴란드 여성 수만명이 “낙태를 허용하라”고 외치며 철제 옷걸이를 높이 들었다. 철제 옷걸이는 ‘위험한 낙태’를 의미한다. /AP 연합뉴스

낙태가 불법이었던 일부 유럽 국가에서도 이런 흐름이 나타난다. 남유럽의 초미니 가톨릭 국가 산마리노는 지난해 9월 국민투표 결과 77%의 찬성으로 156년간 유지돼온 낙태금지법을 폐지했다. 아일랜드도 지난 2018년 국민투표로 157년 만에 낙태죄를 폐지했다. 아일랜드 여성들이 매년 영국으로 원정 낙태를 떠나는 문제가 기폭제가 됐다.

동유럽 최대국이자 가톨릭 신자가 90%인 폴란드에선 낙태 시술을 거부당한 임신부가 연이어 숨지면서 전국에서 시위가 들끓고 있다. 폴란드는 지난 2020년부터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따른 임신, 임부의 생명이 위독한 경우 외엔 낙태를 전면 금지, 태아가 사망하거나 양수가 일찍 터질 때 해야 할 제왕절개 수술조차 의사들이 꺼려 임부들이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 폴란드 시위대는 여성들이 철제 옷걸이를 몸에 넣어 자가 낙태까지 하고 있다며 ‘옷걸이 시위’를 벌이고, 성당을 공격하는 과격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오스틴 AP=연합뉴스) 지난해 9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시위대가 새 낙태 제한법에 대한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명 '심장박동법'은 낙태 금지 시기를 현행 20주에서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임신 6주로 앞당기며,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따른 임신의 경우에도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 법이 헌법상 권리를 침해했다며 낙태권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오스틴 아메리칸-스테이츠맨 제공

반면 미국에선 지난해 텍사스주에서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일명 ‘심장박동법’이 시행되는 등 남부 보수 성향 주들에서 낙태 규제가 강화돼 보수·진보 진영 간 첨예한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민주당은 낙태 수술에 연방 예산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공화당 반대로 막혔고, 연방대법원도 텍사스주의 손을 들어줬다. 민주당은 11월 중간선거에서 낙태와 여성 인권을 연계시켜 쟁점화할 태세다.

중국은 그간 1자녀 정책 등으로 낙태를 전혀 규제하지 않다가 최근 저출산과 인구 감소 문제가 커지자 연평균 950만건에 달하는 낙태를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 여성들의 반발에 부닥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