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푸틴의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군대 투입을 지시한 것을 두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AFP 연합뉴스

바이든 미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 반군 점령 지역(돈바스)에 군대 투입을 지시한 지 하루 만인 22일(현지 시각) 이를 ‘침공(invasion)’으로 규정, 대러 경제제재를 발표했다. 미 정부는 전날까지만 해도 러시아군의 진입 결정에 대해 침공이라고 규정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수세적 대응으로 러시아의 공세 수위가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비판 여론이 커지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백악관은 그러면서도 “러시아의 향후 행동에 따라 추가 제재의 강도가 달라질 것”이라며 ‘단계적 제재’ 방침을 시사했다. 푸틴을 직접 옥죄는 고강도 추가 제재 ‘카드’는 계속 손에 쥐고 향후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겠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미국의 이날 제재는) 러시아라는 요새(要塞)의 표면에 긁힌 자국 정도”라고 했다. 포린폴리시(FP)는 이날 “(미 정부 제재의)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며 “(이날 제재 대상에 오른)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 세르게이 키리옌코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제1부실장 등은 이미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당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은 반도체 등 첨단기술 수출 통제 조치,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국제 결제 시스템에서 차단하는 방안 등의 고강도 제재는 러시아의 대응을 봐가며 꺼내겠다는 전략이다.

2월 22일(현지 시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아제르바이잔과 동맹 협정식을 마치고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AP 연합뉴스

푸틴 대통령도 이날 “지금 당장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으로 러시아군을 보내려는 것은 아니다”라며 영국 정부가 밝힌 ‘러시아 탱크 진입’을 부인하며 숨을 고르는 듯한 발언을 내놨다. 그는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과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의 요청이 있을 경우 이들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주장했다. 또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회담에선 “러시아가 옛 제국의 국경을 복원하려 한다는 시중의 주장은 낭설”이라며 “(러시아의 최근 행보는)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에 따라 구소련에서 떨어져 나간 독립국의 협력 강화를 적극 추진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미국과 서방이 러시아의 행위를 ‘침공’으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대응을 쏟아내자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듯한 모양새다.

미·러 양측이 치열한 ‘수싸움’을 전개하면서 돈바스 지역에서 ‘총성 없는 대치 상황’이 장기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양국은 우크라이나 문제로 정면 충돌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기에 협상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는 최선의 해법은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 야망을 포기하고 중립국으로 남는 것”이라며 사실상 외교적 협상을 촉구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이날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은 여전히 외교에 열려 있고, 외교가 여전히 가능하길 바란다”고 했다.

다만 조만간 양국의 협상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24일로 예정됐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회담을 취소한다고 이날 밝혔다. 이 회담에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됐던 미·러 정상회담도 당분간 개최가 어려워졌다.

22일(현지 시각)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지지 시위에서 한 참석자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얼굴 그림 위에 살인자(KILLER)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러시아가 추가적 군사 조치를 하지 않고 돈바스 반군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면서 대치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돈바스 일부 지역이 지난 2014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 반도처럼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LPR과 DPR이 점령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주민 투표를 한 후 러시아에 대한 합병을 요청하면, 이를 통해 돈바스의 분리를 고착화하는 동시에 러시아의 실효적 지배가 이뤄지는 방식이다.

그 이후에는 돈바스 내 우크라이나 정부군 점령 지대를 놓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주권을 주장하며 양쪽 군대가 직접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파리의 한 서방 외교관은 “러시아는 이 상황을 다시 지렛대로 활용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와 러시아에 대한 안보 보장 등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