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길에 거의 한숨도 못 잤습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앞차와 멀어지면 그 자리로 뒤차가 들어오니 어쩔 수가 없었죠.”
우크라이나 교민 김도순(58)씨는 26일(현지 시각) 키예프에서 출발한 지 만 이틀 만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의 크라코베츠 검문소에 도착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자녀 때문에 떠나지 않고 있다가, 러시아 공습이 시작된 24일 새벽에야 급하게 출발했다”고 했다. 하지만 폴란드 국경까지 가는 600㎞의 도로는 이미 차량으로 가득했다. 그는 “특히 국경 검문소 앞 12㎞를 이동하는 데 36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경찰이 승객과 짐을 일일이 확인하는 탓에 차들이 1~2시간씩 꼼짝도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 와중에 처가 가족과 생이별도 겪었다. 그는 “당초 집을 나설 때는 장모님과 처남이 같이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정부가 24일 밤 국가 총동원령을 내린 뒤 18~60세 남성의 출국이 금지되면서 처남과 장모님은 우크라이나에 남았다”고 했다.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 김씨 가족은 모두 눈물바다가 됐다.
외교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 남아 귀국을 거부하고 있는 교민은 20여 명이다. 이들 상당수가 김씨처럼 현지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다. 이름을 밝히기 거부한 한 교민은 “이곳에서 (선교사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수많은 사람과 정을 쌓았다”며 “아내와 자녀 외에 처가 식구들도 여럿인데 이들을 두고 떠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든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교민 유경훈(42)씨 역시 서부 도시 리비우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아이 둘을 한국으로 데리고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곳에 남았다”고 했다. 그는 “(서쪽 국경 쪽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안전하리라고 생각했던) 리비우에도 지금 공습경보가 울리는 등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며 “가족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크림반도와 인접한 남부 도시 멜리토폴에 머물고 있는 전재민 선교사 역시 우크라이나 시민권자인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남았다. 이 지역 주변에서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의 교전이 이어지면서 전 선교사와는 연락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통신과 전력이 끊기고, 고립된 상태라 지금 밖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고 있다”고 했다.
뒤늦게 가족과 탈출을 결심한 교민도 있다. 김경석(38)씨는 최근 우크라이나인 여성과 결혼해 키예프에 머물다 26일 아내와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그는 “(폴란드 국경 근방 도시인) 리비우 쪽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 (서쪽으로) 갈 수가 없다”며 “루마니아 쪽으로 가는 중인데, 국경 검문소 앞에 줄이 20㎞나 이어져 다른 곳을 통해 가는 방법을 다시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김씨 부부의 피란길에는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관 직원 2명도 동행했다.
헝가리 국경을 통한 탈출도 시작됐다. 교민 강현창씨는 “주우크라이나, 주헝가리 대사관 직원들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우크라이나·헝가리 국경을 넘었다”며 “지금이라도 떠나려는 사람들은 헝가리 쪽 경로를 고려해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키예프에서는 지난 25일부터 서부 리비우까지 피란 열차 운행이 시작됐다. 몇몇 교민이 가족을 데리고 역에 나갔으나 주로 아이를 동반한 여성만 골라 태우고, 외국인과 남성은 태워주지 않아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한 교민은 “탑승을 막는 경찰과 외국인의 몸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면, 아버지와 가족의 생이별이 속출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