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가 선전을 거듭하면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동안 젤렌스키에게는 정치 경험 없는 코미디언이라는 이유로 지도자로서 함량 미달 아니냐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에 맞서 수도 키예프를 앞장서 지키는 모습이 알려지면서 위기 상황에서 제 역할을 하는 리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 기관 ‘레이팅스’가 지난 주말 우크라이나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91%가 젤렌스키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젤렌스키는 2019년 대선에서 73%를 득표해 페트로 포로셴코 당시 대통령을 큰 격차로 눌렀다. 변화를 원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TV 드라마에서 대통령 역할을 맡아 인기를 끌었던 젤렌스키가 실제 대선에서 승리하자 서방 언론들은 “드라마가 현실이 됐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는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중부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와 증조부의 세 형제가 홀로코스트 희생자다. 젤렌스키의 아버지는 컴퓨터공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어머니도 공대 출신 엔지니어였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젤렌스키는 키예프국립경제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배우, 프로듀서, 연예 기획사 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주로 연예계에 머무르긴 했지만 코미디언은 그의 경력 중 일부분일뿐이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건 지난 2015년 방영된 ‘국민의 종’이라는 드라마였다. 젤렌스키는 부패한 정부를 비판하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 역할을 맡아 일약 ‘국민 배우’로 떠올랐다. 드라마에서 젤렌스키는 학생들에게 무능력한 정부를 성토한다. 이 장면을 한 학생이 몰래 촬영해 온라인에 띄우고, 이로 인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대통령에 당선된 젤렌스키가 부패한 정치인들을 몰아낸다는 게 이 드라마의 줄거리다. 여세를 몰아 젤렌스키는 지난 2018년 드라마 제목과 이름이 같은 ‘국민의 종’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집권 초기 정치는 물론 행정 경험도 없는 젤렌스키가 국정을 제대로 끌고 갈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대선 당시 젤렌스키는 부패 척결, 세제 개혁, 에너지 자급자족 실현 등의 구호성 공약을 내세웠을 뿐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내놓지 않았다. 드라마 속 이미지로만 권력을 잡았다는 냉소적인 평가가 많았다.
그는 2020년 코로나 유행 초기에 “코로나에 걸렸다가 이겨내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가 실제로 코로나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 행동이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젤렌스키는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서는 서방과 공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책 마련을 위해 애썼다. 작년 8월 키예프에 주요 44국 대통령·총리·장관들을 모아 ‘크림 플랫폼(Crimea Platform)’이라는 국제회의를 출범시킨 것이 그의 대표적인 외교 성과물이다. 젤렌스키는 러시아 위협에 맞서기 위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유럽 연합)에 가입하게 해달라며 강대국 정상들을 설득하는 작업도 해왔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해 취임한 뒤 백악관으로 초청한 유럽 정상으로는 젤렌스키가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에 이어 두번째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보다 빨랐다. 그만큼 젤렌스키는 적극적으로 미국 정부에 손을 내밀었다. 이번 러시아의 침공 이전에도 젤렌스키는 군복을 입고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반군과 싸우는 정부군을 찾아가 격려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줬다.
젤렌스키는 취임 초기 공공 부문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의무적으로 쓰고 TV에서 우크라이나어 방송을 90% 이상 편성해야 한다는 법안을 만들었다. 러시아어를 쓰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언어를 통한 국가적 역량 결집을 시도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