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UN) 문을 닫으려고 하나? 국제법이 통용되는 시대는 끝난 것인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안전보장이사회의 화상 초청 연설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러시아군이 30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국제사회가 경제 제재 이상의 물리적 개입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해 ‘행동에 나서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레이드마크인 국방색 셔츠 차림에 수염이 덥수룩한 채 실시간 연설에 등장, 우크라이나 부차와 이르핀, 디메르카, 마리우폴 등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희생자 시신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90초 분량의 영상을 틀었다. 회의장은 각국 외교관들의 한숨과 탄식으로 술렁였다.
전날 직접 부차를 둘러보고 온 젤렌스키는 “그들은 오직 재미로 자동차를 타고 있던 민간인을 탱크로 깔아뭉개고,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베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들은 자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성폭행 당하고 살해됐다”며 “이런 짓은 다에시(IS·극단주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 같은 테러리스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젤렌스키 대통령은 “유엔 헌장 1조가 무엇인가. 헌장 1조도 지키지 못하는 유엔이 무슨 존재 의미가 있나. 유엔 문을 닫으려고 하는 것인가”라며 무기력증에 빠진 유엔을 저격했다. 유엔 1조는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평화를 위협하는 침략하고 파괴하는 행위를 진압하기 위한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4월 안보리 의장국인 영국의 바버라 우드워드 주유엔 대사,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미국 대사 등은 침통한 얼굴로 젤렌스키의 연설을 지켜봤다. 젤렌스키는 “유엔을 문을 닫으려는 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당장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특히 “우리는 안보리 거부권(veto)을 ‘살인의 권리’로 바꿔 사용하는 나라를 상대하고 있다”며 러시아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퇴출을 요구했다. 안보리는 유엔에서 유일하게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관이지만, 미국과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상임이사국 5개국(P5) 중 한 나라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모든 논의나 결정을 막을 수 있는 구조다. 이 때문에 가해국인 러시아와 러시아를 지지하는 중국의 방해로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직접적 군사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후에도 러·중의 반대로 대북 제재나 규탄 결의안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이날 젤렌스키의 연설과 동영상을 지켜본 안보리 이사국 외교관들은 박수로 격려를 보냈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부차에서 살해된 민간인들의 무시무시한 사진들을 잊을 수 없다”며 “실질적인 책임 추궁을 보장할 수 있는 독립 조사를 즉각 요구한다”고 말했다. 반면 바실리 네벤쟈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군이 철수한 직후엔 아무 시신도 없었다”면서 민간인 학살이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계속했다. 장쥔 주유엔 중국대사도 “성급하게 (러시아만)비난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사건의 전후 상황과 원인에 대한 검증부터 해야 한다”며 러시아 편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