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유엔(UN) 핵심 기구 중 하나인 인권이사회에서 퇴출됐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의 민간인 대량 학살에 대해 세계가 강력한 분노를 표시한 결과였다. 1945년 유엔 창설의 주역이자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가가 유엔 산하 기구에서 퇴출된 것은 77년 유엔사(史)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이 큰 타격을 받는 동시에, 미국·유럽 등과의 갈등 관계도 더욱 첨예화할 전망이다.

유엔은 7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긴급 특별총회를 열고 러시아의 인권이사회 이사국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회의장 대형 스크린에 찬성 93국, 반대 24국, 기권 58국의 표결 결과가 게시돼 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유엔 산하 기구에서 퇴출당한 것은 77년 유엔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AFP 연합뉴스

유엔 총회는 7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개최한 긴급 특별총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을 근거로 인권이사회 이사국 자격 정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투표에는 전체 193개 회원국 중 175국이 참여했다. 기권 58국을 제외한 117국 중에서 93국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사국 자격 정지에 필요한 정족수(78국, 투표 회원국의 3분의 2)를 훌쩍 뛰어넘었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 등 24국은 반대표를 던졌다.

린다 토머스 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이번 의결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에게 결코 유엔이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명확한 메시지”라며 “지독한 인권 침해국이 유엔에서 인권과 관련한 리더라는 지위를 가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러시아 외교부는 이날 유엔 표결에 대해 “독립적 외교정책을 펼치는 러시아를 처벌하려는 불법적인 조치”라고 비난하며 “인권이사회에서 쫓겨나느니 자진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유엔의 인권 관련 최고 의결기구인 인권이사회는 각국 인권 상황을 심의하고 조직적 인권 침해에 대응하는 권한을 가진 조직이다. 유엔 창설 직후인 1946년부터 기능해온 핵심 기구 중 하나로 미국이 중심 역할을 해 왔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반인권 범죄를 규탄하고 개선 조치를 촉구하는 북한 인권결의안을 매년 채택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유엔의 러시아 인권이사회 퇴출 결정은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한 수퍼 파워 중 하나를 국제 무대에서 쫓아낸 기념비적인 외교 사건이다. 유엔은 지난 2011년 리비아의 카다피 독재 정권이 반정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인권이사회에서 퇴출시킨 전례가 있다. 하지만 러시아처럼 세계적으로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큰 주요국이면서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나라가 유엔 기구에서 쫓겨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나 정치적 영향력은 구소련 시절에 비하면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진영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 규모의 원자재·식량 수출로 서유럽 선진국부터 중동·아프리카·남미·아시아 등의 여러 국가까지 경제적으로 긴밀히 얽혀있다.

특히 세계 최다 핵탄두 보유국이면서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를 자극한다는 것은, 미국과 서방으로서도 위험성이 큰 실험이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번 표결을 앞두고 일부 회원국에 긴급 메모를 돌려 “명확히 반대표를 던지지 않으면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제스처’로 간주하겠다”며 협박성 외교전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날 표결에 앞서 찬성 국가들을 대표해 20분간 연설에 나선 세르게이 키슬리차 우크라이나 주유엔 대사는 “러시아는 단순히 우크라이나에서만 살인과 고문, 강간, 강도 같은 인권 침해를 저지르는 나라가 아니다. 국제 평화와 안보의 토대를 흔드는 나라”라며 “이런 나라가 유엔 인권이사회에 앉아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호소했다. 이에 겐나디 쿠즈민 주유엔 러시아 차석대사는 “부차 민간인 학살은 조작된 사건”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부결을 촉구했으나 소용없었다.

러시아의 유엔 인권이사국 자격 정지가 당장 러시아군의 침략과 만행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며 ‘상징적 이벤트’ 또는 ‘국제적 망신 주기’에 가깝다는 관측도 나온다. 유엔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안보리를 통한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인데 이는 당사자인 러시아와 대표적인 친러 국가인 중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옵션이다.

하지만 이번 러시아 퇴출을 통해 1국 1표 체제이자 강대국의 거부권이 통하지 않는 유엔 총회에서만큼은 세계 다수 국가가 똘똘 뭉쳐 ‘반인륜 국제 범죄’에 대해 단합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미국 등 자유진영은 향후 특정국의 무분별한 안보리 거부권을 우회할 수 있는 유엔 개혁안을 구상할 가능성이 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러시아가 참석하는 G20 회의를 보이콧하겠다”고 하는 등 다른 국제 협의체에서 러시아 퇴출 운동이 거세질 수도 있다.

이번 유엔 총회의 표결은 지난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 표결 때보다 찬성표가 크게 줄었다. 당시 2건의 결의안은 5국의 반대와 30여 국의 기권 속에 각각 141표, 140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이번엔 반대국이 24국, 기권국이 58국이었다. 지난달 매번 기권했던 중국은 이번에 공개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대해 “러시아의 비윤리적 침공 행위를 단순히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 인권이사국에서 퇴출시키는 전례 없는 외교 제재를 가하는 데 대해 부담을 느낀 국가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러시아가 코로나 백신을 무상에 가깝게 공급해온 남미·아프리카 나라들, 최근 국제 원유·곡물가 급등으로 서방의 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할 여유가 없는 취약한 개도국들이 대거 반대·기권국에 이름을 올렸다.

독재 또는 권위주의 정권이 장악한 나라들도 뭉쳐 세를 과시했다. 북한과 이란, 시리아, 벨라루스, 쿠바 같은 사회주의·권위주의 국가들은 러시아의 인권 문제를 이유로 한 유엔 기구 퇴출이 가시화되는 데 격렬히 저항했다. 이날 우크라이나를 제외하면 연설에 나선 11국이 모두 러시아를 옹호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평화적 해법을 추구하는 대신 회원국 사이의 대립과 불신을 추구하는 것은 우려스럽다”(북한) “(서구의) 이중잣대에 반대하며, 인권이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하는 일도 반대한다”(중국) “민간인 학살의 진상 조사가 먼저지 인권이사회 퇴출이 급한 일인가”(쿠바) 같은 논리를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