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백도, ABS(잠김 방지 제동 시스템) 브레이크도, 내비게이션도 없다. 그저 시동 걸어 달리고 멈추는 수준이다. 우리나라나 미국, 유럽 등에선 판매가 거의 불가능한 정도다. 그래도 제조사는 대대적인 홍보를 한다. 러시아에서 이달 새로 출시된 ‘라다 그란타 클래식 2022′ 이야기다. 라다(‘돛단배’라는 뜻)는 구소련 시절인 1970년부터 생산된 러시아의 대표적 승용차 브랜드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11일(현지 시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 신차가 등장했다”며 “러시아 일각에서는 이 차에 대해 ‘서방의 러시아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극복한 상징적 제품’이라며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격은 76만루블(약 1700만원)로 러시아에서 판매되는 승용차 중 가장 저렴하다.
하지만 러시아 측 자화자찬과 달리 이 차는 안전과 기능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력 없는’ 제품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텔레그래프는 “국영 자동차 업체 ‘아프토바스’가 내놓은 이 차량은 1990년대에 나왔다면 딱 맞을 자동차”라며 “러시아가 다시 구소련 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심한 제품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했다.
이 자동차가 이처럼 ‘허점 투성이’가 된 것은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로 각종 첨단 부품의 수입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에어백과 ABS, 내비게이션 등에는 미국·유럽 등의 기술로 만든 각종 센서와 반도체가 들어간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기술로 제조된 반도체와 이를 사용한 제품은 러시아 수출이 금지됐다. 이 때문에 이 차에는 러시아 국산 아니면 중국 등 ‘우방국’ 부품만 사용했다. 텔레그래프는 “이 차에는 배기가스 정화 장치도 없어서 유럽의 1996년 배기가스 배출 기준을 겨우 충족할 정도”라고 했다.
구소련 시절 ‘국민차’로 각광받았던 라다 차량은 디자인이나 편의성보다 기본 성능에 초점을 맞춰 싸고 튼튼하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다 2011년 제조사인 아프토바스가 프랑스 완성차 업체 르노 계열사가 되면서 각종 편의 장치가 들어가고, 디자인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3월 르노 자동차가 아프토바스 지분 68%를 러시아 정부에 넘기고 철수하고, 서방 부품 공급도 중단되면서 다시 옛 스타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