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최대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이 러시아의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군을 해방군으로, 우크라이나군을 ‘나치’로 묘사한 거짓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들으며 적과 아군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일부 우크라이나 국민은 러시아군 포격으로 인한 주거지 파괴와 민간인 살상을 우크라이나군 소행으로 믿고 노골적 적대감까지 드러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7일(현지 시각) “양측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루한스크주 세베로도네츠크 인근 리시찬스크 주민 상당수가 우크라이나군이 자기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러시아어 사용 지역인 이곳에서는 러시아와 친러 세력이 운영하는 라디오와 TV 방송 채널이 압도적으로 많다. NYT는 “격렬한 전투로 인터넷망이 모두 끊겨 (친러 성향) 러시아어 방송만이 유일한 외부 정보 채널이 됐다”며 “이 방송들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비방하고, 러시아군에 대한 저항을 멈추라고 강조하는 내용이 계속 나온다”고 전했다.
리시찬스크에는 주민이 3만~4만명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일부는 심지어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와 피난 권유도 거부하고, 하루빨리 러시아군이 진주해 자기들을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현지 언론들은 “러시아의 집요한 심리·선전전이 돈바스 주민을 러시아의 ‘대체 현실’에 빠져들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내놨다. 러시아는 올 초부터 “미국, 유럽 제국주의자와 손잡은 나치 세력이 동포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이간질하고, 러시아계 주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인터넷과 소규모 미디어를 통해 퍼뜨려 왔다.
러시아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도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SPIEF) 연설에서 “세계 경제 위기는 서방 때문이고, 우크라이나 침공은 돈바스 지역 주민 보호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에너지와 식량 가격 상승 등 세계 경제 불안은 (돈을 무제한으로 푼) 미국 행정부와 유럽 관료들 탓”이라며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켜)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는 ‘푸틴 인플레이션’ 주장은 헛소리”라고 했다.
SPIEF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등 러시아의 ‘우호국’ 정상들이 대면이나 온라인으로 참여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서방이 노골적 반(反)러 정책을 폈고,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점령도 추진했기 때문”이라며 “러시아는 (러시아계를 보호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내부 분쟁에 어쩔 수 없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대해서는 “나토와 달리 EU는 군사 기구나 정치 블록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날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후보국 지위 부여를 추천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는 23~24일 열리는 EU 정상 회의에서 27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승인 결정을 내리면 우크라이나는 후보국 지위를 얻고, 정식 가입을 위한 본격 협상에 들어가게 된다.
러시아는 유럽에 대한 에너지 공급 중단 압박 수위도 높여가고 있다.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 가스프롬은 15일부터 천연가스 프랑스 공급을 중단했고, 슬로바키아와 이탈리아에 공급하는 양은 절반으로 줄였다. 또 터키에는 러시아와 터키를 잇는 ‘튀르크 스트림’ 가스관을 통한 가스 공급을 21일부터 1주일간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이들은 모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다.
가스 수요가 줄어드는 여름철엔 큰 문제가 없지만, 장기화할 경우 올겨울 ‘가스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론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국민 불만이 누적되면서 각국 집권당이 직면한 선거에서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 식량 위기 같은 문제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휴전 요구도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