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빼앗아 강제 합병한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잇는 케르치해협 대교(일명 크림대교)에서 8일 오전 6시 7분(현지 시각) 대형 폭발이 발생했다. 러시아에서 크림반도 쪽으로 가는 차량용 교량 상판 수십m가 무너지고, 바로 옆 철도 교량을 지나던 연료 수송 열차 59개 칸 중 7개에 화재가 나 철도 교량도 수십m 불탔다.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직접 잇는 유일한 수송로가 일부 손상을 받으면서 크림반도 지역이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크림대교는 총 길이 18㎞로 유럽에서 가장 길다. 왕복 4차선인 차량 교량과 복선인 철도 교량으로 이뤄져 있다. 연간 10만량의 열차와 550만대의 차량이 이 다리를 이용한다. 이 다리는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정학적 야욕을 드러낸 상징이자 크림반도를 러시아 본토와 통합시키는 ‘전략 무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18년 크림반도 동부 케르치반도와 러시아 크라스노다르주 서부의 타만반도 사이에 이 다리가 놓이면서 선박으로 이틀 이상 걸리던 양측 간 물류 시간은 반나절로 줄었다. 이처럼 막대한 운송 능력 덕에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군의 핵심 보급로 역할을 수행했다. 우크라이나에는 이 다리를 ‘공격 대상 1순위’로 꼽았다.
러시아 내무부와 국가반(反)테러위원회, 러시아연방보안국(FSB) 등이 참여한 조사위원회는 이날 “폐쇄 회로 TV 영상 등 증거 자료를 분석한 결과 차량용 교량을 지나던 트럭에서 폭탄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건 현장에서는 당시 차량으로 다리를 지나다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녀 2명 등 총 3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자살 폭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나 관련 단체를 이번 사건의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 조사위원회는 “이 트럭의 소유주는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거주하는 남성”이라며 “추가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크림대교의 정확한 피해 상황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CNN 등은 위성사진을 근거로 “크림반도 방향 차로 2개가 완전히 무너졌고, 반대쪽 방향 2개 도로도 크게 그을렸다”며 “손상 정도가 심해 복구에 2개월 이상이 걸릴 수 있다”고 했다. 또 “30m 떨어진 철도교 역시 다리 구조물이 완전히 불타거나 휜 모습이 확인됐다”며 “(정상적) 열차 운행이 가능할지 미지수”라고 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도 “폭발 때문에 크림대교의 구조가 손상돼 완전 복구에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고 했다. 크림반도 당국은 9일 오전 “엄격한 안전 검사 후 현재 파괴되지 않은 차량용 교량으로 승용차 통행을 재개했다”며 “다만 대형 트럭과 밴, 버스 등은 페리를 이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철도 역시 이날 오후 7시부터 운행이 일부 재개됐다.
크림대교가 피해를 입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이 또 한번 크게 요동칠 전망이다. 당장 우크라이나 남부를 점령한 러시아군 보급에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현재 러시아 병참선은 주로 철도를 따라 구축돼 있다. 이 중 가장 물류량이 많은 것이 크림대교를 지나 최전방 헤르손과 자포리자 등으로 이어지는 철도였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이 철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영국 국방부는 “(러시아 본토에서) 동부 돈바스 지역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있지만 수송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우크라이나군 공격에 노출돼 있다는 문제가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전쟁연구소(ISW) 역시 “우크라이나군이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을 이용해 러시아군 병참선의 약점을 지속적으로 공격해 왔던 상황”이라며 크림대교 파괴가 러시아군 보급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전쟁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에게 미치는 심리적·상징적 타격도 크다. 이 다리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과 흑해로의 영향력 확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이었다. 또 우크라이나 남부 최전방에서 300km 이상 후방에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18년 5월 크림대교 개통식에 직접 참석해 “제정 러시아 시대 이래 러시아의 꿈이 드디어 이뤄졌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자신이 손수 트럭을 몰고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군수품 외에도 크림반도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 상당수가 이 다리로 공급되고 있어 민심 동요까지 나타나고 있다. 크림반도 행정부는 크림대교 폭발 사건으로 연료와 식료품 고갈 우려가 고조되자 이날 식료품 구매 한도를 ‘1명당 3㎏'으로 제한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배후로 지목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2월 러시아의 침공 직후부터 “크림대교를 폭격해 파괴하겠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우크라이나 측이 크림대교 폭발 사건을 축하하고 있다”며 “민간 시설 파괴에 대한 이런 반응은 우크라이나가 테러리스트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당수는 “이번 사건은 (우크라이나의) 테러 공격”이라며 “특별 군사작전을 대테러 작전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러시아 강경파들은 “극단적으로 가혹한(extremely harsh)” 보복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8일 밤부터 9일 새벽까지 우크라이나 남동부 자포리자 인근 마을 주거지에 여러 발의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17명이 사망하고 87명이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측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 ‘우크라인스카프라우다’는 정부 고위 인사를 인용해 “크림대교 폭발은 우크라이나 보안국 특수전 부대의 성과”라고 보도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은 “이번 사건은 하나의 시작”이라며 “앞으로 (러시아가 만든) 불법적인 것은 모두 파괴되고, (러시아가) 도적질한 모든 것은 우크라이나에 반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렉시 다닐로우 우크라이나 국가안보보좌관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불타는 크림대교 모습과 매릴린 먼로가 “대통령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합성한 영상을 올려 전날 70세 생일을 맞은 푸틴 대통령을 조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