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 4곳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들 4개 지역이 ‘전시(戰時) 상황’임을 공식 선포한 것이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 군사작전’이라고 칭하면서 러시아 내는 물론 우크라이나 점령지 내에서도 일상생활이 유지되는 ‘평시’임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의 수복 공세가 거세지고 곳곳에서 러시아군의 패퇴가 이어지며 점령지 내 민심이 동요하자, 현지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본격적인 전면전 상황에 돌입하려는 것으로 관측된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 통신은 이날 “푸틴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우크라이나 내 헤르손과 자포리자,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 등 4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말 이 4개 지역 대표와 영토 합병 조인식을 하고 이 지역들을 러시아 영토로 선포한 지 20일 만이다. 러시아 대통령궁(크렘린궁)은 “계엄령은 20일 0시부터 적용된다”고 밝혔다. 계엄령 선포 이유는 따로 밝히지 않았다. 로이터와 AFP 등 외신들은 “최근 이 점령지들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러시아군의) 전황이 한층 불리해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또 우크라이나 국경에 인접한 8개 자국 지역에 이동 제한 명령도 내렸다. 최근 집중적 공격을 받은 벨고로트를 비롯해 크라스노다르, 브랸스크 등 남부 6개 지역과 2014년 강제 합병한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 지역 등이다. 크림대교 폭파 사고와 같이 이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특수 요원에 의한 사보타주 등 후방 교란 작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진 탓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 남부 러시아 점령지 헤르손에서는 주민들의 대규모 소개(疏開)도 시작됐다. 이 지역 친러 행정부 수반인 블라디미르 살도는 동영상 성명을 통해 “선박을 이용한 드니프로강 서안 주민들의 대피가 시작됐다”며 “앞으로 6일간 매일 1만명씩 약 6만명이 (드니프로강 동안의) 안전 지대로 이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헤르손 친러 행정부는 주민들에게 “우크라이나군의 대규모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대피하라”며 “러시아군의 작전 지역에 민간인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긴급 알림 문자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군 총사령관인 세르게이 수로비킨은 18일 러시아 뉴스채널 ‘로시야 24′ 인터뷰를 통해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지면서 헤르손 점령지 상황이 매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로서는 병사를 아끼고 적을 막으면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것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러시아는 이달 들어 헤르손주에서만 약 500㎢에 달하는 점령지를 우크라이나에 빼앗겼다. 미국 전쟁연구소(ISW)는 “헤르손 주둔 러시아군의 후방 보급로가 끊임없이 공격받으면서 전력 약화가 심각한 상황”이라며 “탄약은 물론 식량도 부족해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분석했다. 동부 돈바스 전선에서는 전세 역전에 따른 주민들의 동요도 심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린 포름 등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들은 “DPR과 LPR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탈출해 오는 군인과 주민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일각에서는 “주민 소개는 러시아가 ‘특단의 조치’를 하려는 조짐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소개된 점령지에 우크라이나군이 진주하면, 전술 핵무기 혹은 화학 무기를 사용해 괴멸하려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점령지를 포기하고 퇴각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우크라이나군을 유인하는 ‘덫’인 셈이다.
러시아는 이날도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미사일과 드론을 동원한 폭격을 이어갔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키이우와 남부 미콜라이우에서 3명이 숨졌고, 전국 곳곳에서 전기와 수도 공급이 중단됐다”며 “지난 10일 이후 러시아의 공습으로 우크라이나 내 발전소 3개 중 1개가 파괴돼 올겨울 심각한 전력난이 우려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