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
보리스 존슨 전 총리

취임 44일 만에 사퇴를 선언한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의 후임 자리를 놓고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과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나섰다. 존슨 전 총리는 지난 7월 수낙 전 장관이 주도한 장관들의 연쇄 사임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수낙 전 장관은 뒤이은 총리 경선에서 ‘존슨의 후계자’를 자처한 트러스에 패해 서로 정적(政敵)이 된 관계다. 그러나 성급한 감세 정책의 실패로 영국 정치·경제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보수당마저 정권 교체 위기에 몰리자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 압박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이 영국의 미래를 위해 오월동주(吳越同舟)에 나설지, 아니면 독자 출마로 끝까지 대립할지 나라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BBC와 더타임스 등 영국 주요 매체는 23일(현지 시각) “수낙 전 장관과 존슨 전 총리가 22일 저녁 런던 모처에서 긴급 회동, 후보 단일화를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24일 오후 2시 마감되는 차기 당 대표 경선은 현재 두 사람의 2파전으로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의원 내각제인 영국은 집권당 대표가 총리가 된다. 더타임스는 “후보 단일화 논의가 오갔으나,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존슨 전 총리는 휴가를 보내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이날 급거 귀국, 수낙 전 장관을 만났다. 영국 언론 일각에선 “수낙이 존슨에게 정치적 ‘화해’를 제안하며 외무나 내무장관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놨다.

이번 경선은 하루라도 빨리 새 총리를 내기 위해 출마 문턱도 높였다. 이전엔 20명의 지지만 받으면 됐지만, 이번엔 ‘소속 하원 의원 357명 중 100명 이상의 지지’로 강화했다. BBC는 “22일까지 수낙 전 장관이 128명, 존슨 총리는 53명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존슨 전 총리 측근인 제임스 더드리즈 보수당 의원은 “존슨 전 총리가 내부적으로 이미 100명이 넘는 지지자를 확보했다”고 반박했다.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면 24일 경선 없이 바로 새 당 대표를 확정하고, 25일 찰스 3세 국왕의 재가를 받는 즉시 새 내각을 구성할 수 있다. 테리사 메이 전 총리는 “보수당 의원들은 하루빨리 합리적이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 타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존슨 전 총리가 수낙 전 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존슨 총리는 23일 “나야말로 (당원과 국민으로부터) 민주적 위임을 받은 유일한 후보”라고 주장했다. 수낙 전 장관은 이날 후보 단일화에 대한 언급 없이 “새 총리 후보로 나서겠다”고 출마를 선언했다.

앞서 21일 출마 선언을 한 페니 모돈트 보수당 원내 대표는 이날까지 23명 지지 확보에 그쳤다. 더타임스는 “수낙이 선두 자리를 굳히고, 존슨이 도전하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케미 바데노크 국제통상부 장관이 현직 각료 중 처음 수낙 전 장관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과거 비판 받던 수낙 전 장관의 증세론(增稅論)이 재평가받으며 “영국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존슨 전 총리가 사퇴 압박을 받던 지난 7월 제일 먼저 장관직을 내던지며 그를 궁지로 몰았다는 ‘배신자’ 이미지가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 수낙 전 장관 입장에서는 당내 강경 우파의 리더 격이자, 당원사이에도 인기가 높은 존슨 전 총리의 도움 없이는 당권 장악은 물론 국정 리더십 확보도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영국 경제에 대한 전망은 계속 나빠지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21일 영국의 국가 신용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 회사는 “불안정한 영국 정치 상황으로 정책 예측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평했다. 골드만삭스도 내년도 영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마이너스 0.4%에서 마이너스 1.0%로 더 낮췄다. 한편 트러스 총리가 퇴임 후 받게 될 한 해 11만5000파운드(약 1억8600만원)의 공공직무비용수당(PDCA)을 놓고 노동당과 자유민주당 등 영국 야당은 “큰 물의를 일으키고 44일 만에 퇴임을 선언한 사람이 이런 돈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며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