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파산한 암호화폐 거래소 FTX의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가 13일(현지 시각) 사기 등 8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건을 맡은 미국 뉴욕남부지검의 데이미언 윌리엄스 검사장은 “미국 역사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 중 하나”라고 했다.
뉴욕남부지검은 이날 뱅크먼-프리드를 사기, 돈세탁, 불법 선거자금 공여 등 혐의로 기소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뱅크먼-프리드는 FTX를 설립한 2019년부터 지난달 파산할 때까지 FTX 이용자와 투자자 자금을 자회사인 알라메다 리서치로 빼돌려 부채 상환 등에 사용했다. 일부 자금으로는 바하마에 호화 부동산을 사들였다. FTX가 바하마에서 사들인 부동산은 총 35곳, 2억5630만달러(약 3300억원) 규모다.
정치권에 로비도 이뤄졌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뱅크먼-프리드 등이 최근 수년간 7000만달러(약 900억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기부했다고 보도했다. 올해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기부된 돈만 4000만달러(약 520억원)에 달한다. 대부분 민주당과 진보성향 단체로 흘러갔다. 윌리엄스 검사장은 “고객에게서 훔친 더러운 돈이 부자들의 헌금으로 위장돼 초당적 영향력을 돈으로 사고, 워싱턴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뱅크먼-프리드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이용됐다”고 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도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뉴욕 남부연방지방법원에 뱅크먼-프리드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투자자를 상대로 수년간 사기 행각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소장을 보면, 뱅크먼-프리드는 2019년 5월부터 FTX 주식 투자자들로부터 18억달러(약 2조3300억원)를 조달했다. 이 가운데 11억달러는 미국 투자자 90여명으로부터 모았다. 이 돈을 자회사인 알라메다 리서치로 빼돌려 호화 부동산 매입, 정치 헌금 용도로 쓴 것으로 SEC는 파악했다. SEC는 “뱅크먼-프리드는 호화 아파트를 사고, 개인 투자를 위해 알라메다를 돼지 저금통처럼 이용했다”며 “FTX 주식 투자자와 고객들에게 이런 사실을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뱅크먼-프리드는 속임수에 기반한 ‘카드로 만든 집’을 지어놓고, 투자자들에게는 ‘가상화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건물’이라고 속였다”고 했다.
뱅크먼-프리드는 12일 영연방 회원국인 바하마에서 체포됐다. 이후 보석을 청구했으나, 13일 기각됐다. 바하마 법원은 도주 우려가 크다며 보석을 허가하지 않았다.
뱅크먼-프리드는 이날 보석 심문에 짙은 푸른색 양복과 흰 셔츠를 입고 출석했다.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재판 과정에서 ‘해프닝’도 있었다. 재판장인 조이앤 퍼거슨-프랫 판사가 뱅크먼-프리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새뮤얼’까지만 말하고 머뭇거리자, 뱅크먼-프리드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고 한다. 퍼거슨-프랫 판사는 변호인 측의 주장을 듣고 “나는 어제 태어난 게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변호인 측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뱅크먼-프리드는 보석이 허가되지 않음에 따라 다시 교도소에 수감됐다. 심문 이후에는 재판을 방청한 부모 조지프 뱅크먼, 바버라 프리드와 포옹하기도 했다. 뱅크먼-프리드가 언제쯤 미국으로 송환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송환 재판은 내년 2월 8일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