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0도 아래로 곤두박질친 우크라이나의 강추위 속에 가스 공급은 오래전 끊겼다. 전기와 난방이 들어오는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 4시간 남짓. 이런 엄혹한 상황에도 키이우 사람들은 버티고 또 버티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14일(현지 시각) 밤, 정전으로 사방이 캄캄한 키이우 동부 한 아파트촌. 율리아나(45)씨 가족이 사는 아파트로 들어가자 발광다이오드(LED) 전구가 달린 중국산 USB 충전 스탠드가 작은 거실을 밝히고 있었다. “이게 바로 21세기형 촛불이죠. 서너 시간 충전하면 이틀 밤을 버틸 수 있어요.”
그는 “멀리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하겠다”며 물 끓일 준비를 했다. 찬장에서 꺼낸 것은 우리에겐 친숙한 ‘부루스타’ 휴대용 가스레인지. “슈퍼에서 샀어요. 부탄가스랑 같이 팔아요.” 가스 한 통(220g) 값은 2유로(약 2760원) 정도로, 하루 한 개면 세 식구 식사와 차 한 잔씩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율리아나씨는 “우리 집은 7층이라 다행히 수도와 난방이 조금씩 들어오지만, 9층 이상에 사는 주민들은 둘 다 끊겨 정말 힘겨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고 걱정했다.
율리아나씨는 어머니 나데즈다(79)씨, 조카 다니우(17)군과 함께 산다. 그는 남부 헤르손 출신으로, 15년 전 키이우로 상경해 전문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자리를 잡았다. 헤르손에는 부모님과 오빠, 조카 등이 남아 있었는데, 지난 3월 러시아군이 진주하면서 소식이 끊겼다. 7개월 만인 지난달 중순 헤르손 해방 소식을 듣고 고향 집을 찾아갔지만, “아버지가 한 달 전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눈물을 삼켰다. 지병이 있었던 아버지는 러시아군이 병원 문을 닫고 의료 기기를 모두 약탈한 탓에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숨졌다고 했다.
아버지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멋대로 매장한 친러 행정부 사람들은 가족들이 장지에 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율리아나씨는 “이유가 있었다면 우리가 우크라이나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국토 수복 대작전을 벌인 우크라이나군 공세에 밀려 헤르손에서 퇴각한 러시아군은 수도와 가스, 전기, 통신 등 사회 기반 시설을 남김없이 파괴했다고 한다.
율리아나씨 가족을 포함, 헤르손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쓰는 ‘러시아계’다. 이번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이들에게 새 정체성을 강요했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대우는 달랐다. 러시아는 헤르손을 합병하며 “러시아 일부가 조국에 돌아왔다”고 말하면서도 점령지 사람을 ‘우크라이나인’이라며 차별했다.
다니우의 또래 친구들 가운데는 18살이 돼 러시아군에 강제 징집된 아이들도 있었다. 다니우군은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징집병에겐 총도 안 쥐여 준다”고 했다. 혹시라도 이들이 총부리를 아군에게 들이댈까 두려워서라는 것이다. 어린 아들을 전선으로 빼앗긴 어머니들은 징집 버스가 떠난 도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고 한다.
먹고 마시고 몸을 녹일 기본적 삶의 조건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간이지만, 10개월 가까이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이들 3대(代)에게 이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 소중한 안식처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던 이들이 환하게 웃었다. “우린 괜찮아요. 소중한 가족이 곁에 있고, 앞으로 함께할 날이 남아있잖아요. 추운 겨울도, 이 전쟁도 언젠간 끝이 나겠죠.”